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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넘어서는 언어, 세익스피어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2017년 07월 03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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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었다. 한예종 연극클럽이 마련한 무대에서 리어왕으로 땀 흘리며 대사를 외칠 때 청중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고 코츠월드의 대지가 궁금했다. 두 딸의 아첨에 넘어가 진실한 막내를 내치고 부와 권력을 모두 넘겨주는 리어왕이 장녀 고네릴에게 “저기 보이는 강변에서 그 반대편 오른쪽 끝까지 모든 평야를 너에게 주마”. 둘째딸 리건에게 “푸른 초원에서 시작되는 광활한 대지와 희미하게 보이는 지평선 너머까지가 너희 가족들 몫이다”라고 엄숙하게 선언했던 땅이다.

과연 그랬다. 잉글랜드 중부 비옥한 초원과 아름다운 숲,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지는 계곡, 눈부시게 푸른 하늘은 세익스피어(1564-1616) 4대 비극 ‘리어왕’ 의 배경을 완벽하게 연출해놓은 자연의 무대였다.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에이번 강은 짙푸른 녹음 속에서 지상의 풍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익스피어의 고향은 강변 상류에 자리 잡고 있는 아담한 마을 스트렛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기억되는 대문호는 아직도 이 작은 읍내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노출된 목재기둥에 백색 회벽을 바른 튜더양식의 아담한 생가, 여덟 살이나 연상이면 동네 누나였을 아내(앤 해서웨이)의 저택, 죽음과 영생을 바꾼 교회(홀리 트리니티)까지 순례코스 모두를 눈에 가득 담았다. 말년을 보낸 집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져 매일 연극 한편씩이 간이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지워버려라. 나는 운명에 희롱당하는 바보다” 로미오의 애처로운 외침에 “아, 왜 그대는 로미오 인가요” 라며 이루어 질수 없는 양 가문의 운명적 사랑을 원망하는 줄리엣의 연기가 발길을 붙잡았다.

▲ 세익스피어 생가 앞 거리에서

세익스피어 생가 앞 거리에서


의미도 모른 채 독파하고 따라 읽기를 했던 4대 비극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삼촌과 어머니에게 복수하려하지만 결국은 자신도 함께 죽고 마는 햄릿, 믿었던 두 딸의 배신에 치를 떠는 리어왕, 부하의 계략으로 착한 아내를 의심해 죽이는 오델로, 마녀의 꼬임으로 권력만을 탐하다가 죽게 되는 매베스.

그 중에서도 백미는 햄릿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독살된 아버지, 삼촌의 찬탈과 어머니의 배신, 실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현실에서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임을 넘어서 “간결은 지혜의 본질이고 장황함은 겉치레일 뿐이다”라며 생존의 이유를 내뱉는 절규가 모든 시대의 인간을 압도한다. 처절한 복수를 꿈꾸다 결국 자신마저 죽고 마는 허무한 종말 뒤 “이제 남은 것은 침묵뿐”이라며 한탄하는 호레이쇼(죽음을 지켜본 햄릿의 친구)의 독백은 햄릿을 독보적이게 하는 상징적 대목들이다.

이밖에도 ‘겨울이야기’, ‘탬페스트’,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등 희곡 38편과 소네트(연가)154편, 시 2편을 남겼다. 만5천개의 창조적 언어와 2천개의 문체는 그 시대의 놀라움이었다. 인류지성사의 위대한 유물로 남은 이유다. 세익스피어는 역사에서 만나기 힘든 ‘인간연구가’였다. 문학이 현실을 바탕으로 그려지는 속세의 ‘인간대사전’임을 증명했다.

후대가 끓긴 현재 세익스피어 재단이 모든 유산과 작품을 관리하고 있었다. 밀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비즈니스 세익스피어’로 부활된 듯한 아쉬움이 남았다. 16세기의 세익스피어가 21세기 영국을 먹여 살린다는 비유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이 작은 마을에 살던 한 젊은이가 어떻게 ‘세익스피어’ 가 되었는지 비밀스럽고도 놀라운 작품과 엘리자베스 시대를 가로지르는 눈부신 스토리들이 항상 궁금했었다.

▲ 연극이 공연중인 세익스피어 정원
▲ 연극이 공연중인 세익스피어 정원

여름날 오후 마지막 태양이 눈부시게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지친 사람들은 에이번 강가 그늘에서 숨을 돌리고 들꽃은 또 하나의 꽃잎을 잉태시키며 푸르게 비상을 준비하는 순간이다. 세익스피어 탄생 453주년을 알리는 포스터가 장식된 중세의 벽을 따라 걸으며 이 계절을 노래한 소네트 한 구절을 떠올렸다. 어둡고 음산한 북해의 긴 겨울을 지나 피어오르는 꽃과 하늘은 인간의 절망을 환희로 바꿔놓은 경이로움이었을 것이다.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교해 보련다/너 그보다 더 예쁘고 더 화창하다/모진 바람 5월의 꽃봉오리 흔들고/여름은 너무나 짧은 것을/때로는 태양빛이 너무나도 뜨겁고/가끔은 금빛 얼굴이 흐려지는구나/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 사라지고/아름다운 모든 것도 가시고 말지만/그대 지닌 영원한 여름은 바래지 않고/ 그대 지닌 아름다움은 가시지 않는다/죽음도 그대 앞에 굴복하고 말리니/불멸의 노래 속에 시간이 함께 살리라/인간이 숨 쉬고 눈으로 보는 한/이 노래 살아서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라. (세익스피어 소네트 18번)”

그 계절을 관통하며 위대한 작가의 삶과 그늘이 교차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뤘던 그의 깊은 사색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보고자 서성거렸다. 사랑과 결투, 오해, 탐욕, 변심, 분노, 후회가 난무하는 인간세상을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게 잡아내 묘사했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세상의 군상들은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에 대한 경외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의 걸작들이 어쩐지 염세적이고 반사회적 언어들로 가득 채워졌다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질적 과제이면서도 해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기에 쉽게 잊혀지지 않고 남았을 것이다.

▲ 아름다운 에이번 강변의 오후
▲ 아름다운 에이번 강변의 오후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기억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보편성과 위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에게 들려주는 지대하고 공통된 지혜가 수없이 많은 통찰의 언어로 완성되었다. 개인의 천재성도 놀랍지만 영국사회가 잃지 않고 유지해온 지적이고도 성숙한 문화 역사적 풍토가 비옥한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부러운 부분이다.

비극에서 희극으로 눈을 돌린 세익스피어는 작품 "뜻대로 하소서 (As you like it)"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질문을 남겼다. “세상이란 모두 하나의 무대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배우에 불과하다. 그들은 무대에 들락날락 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여러 역을 하게 된다. 당신은 어떤 역을 하고 있는가”. 에이번 강가를 따라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세익스피어의 질문대로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배역을 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해야만 하는 배역에 맞춰 살고 있는지.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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