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후지산, 기다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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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후지산, 기다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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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白山)은 언제나 영혼을 동반하고 있어 엄숙하고 경건하다. 하얀 것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을 내뿜는다. 차가운 절제와 섬세한 영감, 움직일 수 없는 전율을 불어 넣는다. 설산을 밟으면 그 느낌이 머릿속에 눈처럼 쌓인다. 잘 녹지 않는다. 그래서 늘 넣고 다니게 된다. 해빙이 느껴지면 다른 풍경을 또 집어넣는다. 일정한 간격의 차가움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다. 가슴이 벅차올랐던 히말라야나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눈 덮인 백두산이 내 몸안에 체화되어 있다. 한번 시선으로 들어온 설산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의식속에 잠겨있다.

반복해서 꺼내보는 일도 거의 한계에 다다를 때 쯤 후지산으로 향했다. 궁금했지만 알지 못하는 산이었다. 어떤 목적이나 바람도 없었다. 산 아래는 꽃들이 지천인데 중간고지 이상은 아직도 눈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3천 미터 봉우리 20여개를 거느린 후지는 도쿄에서 서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야마나시와 시즈오까를 가로질러 누워 있었다. 고대부터 인간이 넘을 수 없는 신의 영역이다. 기타(北)알프스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유럽의 몽블랑이나 북미의 맥킨리를 꿈꿨다.

가와구치(河口)호수의 물결은 봄날 오후 바람으로 심하게 일렁거렸다. 운무가 밀려간 틈 사이로 잠깐 씩 영봉을 보았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데. 기다림의 미학이었다. 허락할 때까지 하염없이 서성이는 인연처럼 말이다. 3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이유를 알만하다. 순백은 마음속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다르마타를 흔들어 깨운다. 신 새벽 히말라야에서 목격한 미지의 끝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사방을 평정하고 우뚝 솟아오른 높이(3774)는 가늠하기 어려운 위엄이었다.

▲ ▲가와구치 호수에서 바라본 후지산

▲가와구치 호수에서 바라본 후지산

인간을 압도하는 후지산은 판화(우끼요에)로 19세기 유럽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자연의 선명하고 경쾌하면서도 과감한 절단을 예술로 끌어올린 장인들의 솜씨 덕분이었다. 에도시대 '가나자와의 파도(가즈시카 호쿠사이)' 는 인상주의 화가들을 흥분시켰다. 1890년대에 '후지36경' 2천점 이상이 프랑스와 독일로 전파되었다. 모네와 고흐, 세잔의 그림 속에 녹아있는 자포니즘의 중심에는 언제나 후지산이 자리하고 있다. 드뷔시는 후지산 달빛을 모티브로 '바다(La Mer)'를 작곡하기도 했다.

인구 2만이 채 되지 않는 가와구치 읍내에 웅장한 현대미술관이 있었다. '하루 마쯔리(봄꽃축제)' 에 맞춰 준비한 후지산 예술 사진전이 백미였다. 중세의 그림과 공예품들도 정갈하게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이중건축구조는 자연광으로 내부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미술관 밖 벚꽃은 꽃잎 한 개씩이 낱낱이 바람에 실려 산화하고 있었다. 춘풍에 불려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처럼.

▲ 19세기 판화 우끼요에 '가나자와의 파도' (후지산이 작게 보인다)

▲ 19세기 판화 우끼요에 '가나자와의 파도' (후지산이 작게 보인다)

"나는 마음을 새롭게 하려는 각오로 가방하나만 달랑 메고 후지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산은 주문받아 그린 것 같다. 연극무대 배경에서나 보던 풍경이다" (다자이 오사무. 1909-1948 '후지산 백경'). 순결한 후지는 38살에 자살한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의 눈에 비친 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얼어붙은 정상의 뒷면에 감춰진 의식의 떨림이 만져지는 것은 그보다 20년을 더 살아버린 세월의 두께 때문일까. 침묵으로 응고되어온 전설의 은둔구역이다.

만년설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항상 흔들린다. 여름에는 눈이 녹기를 바라고 겨울에는 쌓이기를 바란다.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고정된 시선으로 흰 산을 바라보던 다자이의 의식은 이 경계선에서 몹시 흔들렸다고 적고 있다. 그러다가 풀리지 않는 운명과 인생의 허무를 이겨내기 위해 기다림의 꽃을 소설에 담았다. 달맞이 꽃이다(달려라 에로스). 기다리지만 결국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이 인생임을 알기에 그는 너무 젊었다. 청년의 피는 뜨겁지만 차가운 내면을 관찰하기는 쉽지가 않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그 무엇은 멀리 있지 않고 지극히 가까우며 현존하지만 벌써 지나갔으며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붙잡을 수 없고 축복으로 가득 차 있지만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순간적이다 (클라우스 베르거)". 그래서 덧없음을 아는 인간들이 후지를 후지(富士)가 아닌 후지(不死)로 갈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후지산은 그렇게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몸 밖으로 흘러나갔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대표기자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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