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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락구엔, 인간의 파라다이스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2017년 03월 1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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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전쟁과 생존투쟁 모두가 15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처절함이 깃든 원초적 싸움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와 휴식과 앞날의 구상을 위해 집 아닌 다른 공간이 필요했던 시기에 정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경계 없이 무한한 자연으로부터 담을 치고 분리시켜 소유하는 순간, 행복과도 직결되는 심리적 안정이 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고락구엔(後樂園)은 고단했던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생겨난 이른바 미학의 공간이었다.

메마른 가지에서는 움이 트고 동백은 이미 수명이 끝나가고 있었다. 겨울정원 인데도 이상하리만큼 적막하지 않고 만상이 연주하는 음표의 잔치 같았다. 겨울의 끝이 봄과 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넓은 잔디광장이 백미인 오카야마 고라구엔 호수는 하늘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나무와 숲, 바람과 시간이 연출해내는 풍경이다. 왜 정원을 파라다이스(고대 이란어에서 유래)라고 했는지 짐작이 간다. 세파와 거친 자연에서 인간의 내면을 정화시키는 절제의 공간으로 이 만한 대안을 찾기도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3대 정원가운데서도 고락구엔은 가장 깊은 고요함을 품고 있는 듯하다. 몇 해 전 돌아본 가나자와의 겐로구엔(兼六園)은 남성적이고 숲이 울창했다. 미토의 가이라구엔(偕樂園)은 일본적인 풍미가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이곳은 오카야마의 영주 이케다 미쓰마사가 14년 만에 심혈을 기울여 완공한 작품이다. 300년 나이치고는 비교적 수목이 낮고 잔잔하다. “근심을 먼저하고 나중에 즐거움을 느낀다” 는 고락구엔의 의미는 당시 사무라이 지배계급의 인생철학과 사유의 방향이 같은 언어였다.

벚꽃 100그루, 홍매화 100그루, 동백 100그루, 단풍 100그루. 계절을 바꿔가며 인간의 시선에 파노라마를 선사해주는 자연의 군락지는 4만평의 정원 사방을 수놓고 있었다. 6천 평이 넘는 잔디밭 호수에는 숲과 하늘과 우주를 담아낸 시네마가 날마다 상영된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포개지며 하나가 되는 일들이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시절에 맞춰 홍매화는 피어나고 동백은 떨어지는 중이었다.

▲영주가 오면 머물렀다는 엔요테이(延養亭) 정자 앞에서

▲영주가 오면 머물렀다는 엔요테이(延養亭) 정자 앞에서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동백꽃. 문정희)

모를 일이다. 고락구엔의 오솔길에서 떠오르는 시 한수가 비장하게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오만과 무절제를 꾸짖듯 가야할 때를 알고 단번에 목을 꺾어버리는 적동백 꽃봉오리들이 발길을 가로 막는다. 속세에서 떠들썩했던 어느 권력의 비극이 연상되어서였을까. 중앙연못 사와노이케를 지나 낚시가 허용되는 미노시마 섬을 끼고 흰 모래톱 사이 소나무 숲에 가려진 자리지마까지 걸었다. 계절을 잃은 황금색 야생잔디만이 오후를 지키고 있었다.

묵언의 발길에 남는 화두는 역시 침묵하는 존재와 본질에 관한 사유였다. “모든 유(有)에는 비유(非有)가 침투한다. 비유가 들어오면 유는 더 이상 유가 아니다. 그것은 유의 흔적이다” (이즈쓰 도시히로. 게이오대 명예교수).

자연의 정원과 인간의 고뇌가 만나는 지점에서 일렁이는 파도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자신의 독창성이 없으니 나라는 유(有) 역시 나 아닌 요소들이 침투하면서 차차 변해왔다. 씨 하나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을 보면 대지, 빗물, 하늘, 태양, 달빛, 바람 등등 모든 것과 단 한순간도 분리된 적이 없이 바깥 것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비로소 “나는 너희다. 너희는 바로 나다” 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정원과 내가 하나 되는 순간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미 내가 아니며(無常),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라 흔적일 따름이며, 나는 이렇게 시시각각 나라고 주장할만한 독창성이 없기에 공(空)하며, 더불어 내안에는 항상 비현재가 있고 나는 곧 비현재(非現在) 즉 과거의 흔적이다. 쳇바퀴에 갇혀 안으로만 달리는 다람쥐처럼 발길을 재촉하면서 수월찮은 고락구엔 원형코스를 다 돌았다.

▲고락구엔의 아름다운 연못 자리지마 풍경

▲고락구엔의 아름다운 연못 자리지마 풍경

대나무 숲길로 접어들었다. 스르륵 스르륵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 세월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카야마 앞바다 나오시마의 여정을 생각하며 건너편으로 눈을 돌렸다. 까마귀 같이 검은 집들로 누각을 세운 오카야마성이 이쪽 고락구엔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미슐랭 그린 가이드에서 별 3개를 주었다는 정원은 역시 곳곳에 기품이 엿보였다. 자연과 인간의 철학이 만난 절제의 에피쿠로스였다.

함께하는 여행보다 홀로 걷고 싶은 곳이다.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편 가르기로 얼룩진 세상의 적폐가 아니라 내 마음의 먼지를 쓸어내고 싶을 때. 묵언수행하며 정진하는 이들처럼 세상을 향해 눈은 그냥 열어 놓고 마음의 창으로만 보고 싶을 때 다시 찾고 싶어질 것 같다. 붉은 책상포가 가지런히 덮인 후쿠다 티하우스 앞에서 멈춰 섰다. 말차(일본인들이 즐기는 녹차) 한 잔을 바닥까지 비우며 목마름을 훔쳤다. 수풀사이 자주 보이는 불당과 토템의 상징들을 지나 오카야마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세상살이에 지칠 때 쯤 연륜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정원을 꿈꾼다. 인간이 그리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타오엔밍(도연명)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좋은 벗과 술과 정원과 사유가 있으면 인생최고의 낙이라 할만하다.

“정원에서 처음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세요. 꽃으로 가득한 정원으로 오세요. 당신이 오신다면 이 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 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잘라루딘 루미). 산다는 것은 무수히 세월을 보내고 오지 않는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꿈을 낚는 허무한 갈망인지도 모른다. 초봄의 고락구엔은 그렇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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