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하멜의 난파선에서
상태바
[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하멜의 난파선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opinion_top_01.jpg

조선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이웃나라에 정말 처절하게 당한 어둠의 역사다. 치욕과 울분, 자괴감이 압도한다.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마저 느낀다. 1590년부터 1640년 사이의 역사를 읽으면서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선조와 인조, 효종으로 이어지는 무능한 임금들의 초라함을 목도하면 대책이 없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차리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망한 세월을 보냈다. 이러고도 나라가 온전하게 부지되길 바랐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서귀포 쪽으로 돌아드는 해안가 우뚝한 삼방산은 벌써 아지랑이 속에서 아른거렸다. 봄기운이 밀려와 제주의 한기를 걷어내는 중이다. 썰물 때를 기다려 대정의 용머리 해안으로 내려갔다. 바다로 뻗어 나온 용암석 절벽아래의 둘레 길은 장관이었다. 조금 전까지 물속이었던 '용궁땅' 을 걷는 셈이다. 오늘처럼 물결이 잔잔하면 천국이지만 언제 집채만 한 파도가 몰아닥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코스다. 이 길을 온전히 돌아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반도 안 된다니 행운이다.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가 풍랑에 두 동강이 난 채 용머리 해안으로 밀려온 것은 효종 4년(1653년)의 일이었다. 선원 중 절반은 죽고 하멜과 35명만 살아남았다. 제주목사 이원진은 일행을 체포해 감금하고 말이 통하는 박연(베테브레. 표류 네덜란드인으로 이미 조선에 살고 있었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양에서 달포 만에 내려온 그의 입을 통해 이들이 바타비야(자카르타 동인도회사)에서 타이완을 거쳐 왜국(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길이었음을 알아냈다.

살아남은 선원 36명은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인도차이나 식민지 개척의 선두주자였다. 그들의 무기제조와 선박, 화약, 축성기술은 최상급이었다. 10개월 만에 한양으로 압송된 일행은 조사를 마치고 훈련도감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신식 무기를 만들고 기술을 배우려는 열의 자체가 없었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감군과 군졸로 배치되어 마을 순찰에 투입되었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임금행차에 호위병으로 차출되었다. 심지어는 사대부집 잔치에 데려가 춤과 노래를 시키기도 했다.

▲용머리해안 중턱의 하멜기념비

▲용머리해안 중턱의 하멜기념비

전라도 강진과 부안에 분산 이송된 뒤에는 풀을 뽑거나 농사일을 거드는데 동원되었다.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날들을 절치부심하던 하멜은 마침내 나가사키로 탈출(1666년 현종 8년)하는데 성공했다. 에도막부가 항의하고 국제문제화 되어 조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들을 모두 일본에 돌려보냈다. 네덜란드로 돌아간 선원들은 13년 20일의 대기록 '하멜표류기' 를 냈다. 유럽에 조선이 첫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멜 일행을 알아보지 못한 조선의 실패는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난파선 선원들을 상대로 배 만드는 기술을 배워 이미 멕시코까지 무역 길에 나섰던 때다. 남미의 은을 실어다 청나라에 파는 삼국무역으로 짭잘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상관(商館)을 열어주고 서구문명을 한껏 받아들인 보상이다. 하우스텐보스(네덜란드 마을)가 남아있는 나가사키는 17세기 유럽의 축소판이었다. '난학(蘭學. 화란/네덜란드 연구)'으로 개화를 경험한 젊은이들이 사무라이 막부를 타도하고 여세를 몰아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제국의 길을 열었다.

조선에 붙잡혀 있는 동안 하멜은 통탄했다. 그의 부하 한스 로스는 부안으로 이송되었을 때 선박기술을 가르쳐주려고 동분서주했으나 아무도 진지하게 대하는 수군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모두 나른하게 늘어진 자세로 하루하루를 지내는 일상이었다. 조선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모두 혼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소설 하멜. 김영희) 고 조롱한 대목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가사키는 유럽과의 무역으로 번성하는데 조선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한밤중 깊은 잠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이놈의 나라는 임금의 세상과 백성의 세상을 이어줄 줄도 없고 다리도 없다. 임금과 신료들은 언제 저 탐욕과 미몽에서 깨어나 넓은 세상을 볼까. 조선의 높은 양반들은 조선 땅 바깥에 더 넓고 무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그들은 구름위에서 지상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 같다. 조선은 어제에 매여살고 일본은 내일을 보고 산다. 조선은 눈을 감고 살고 일본과 청국은 눈을 활짝 뜨고 산다". 하멜의 독백이 가슴을 친다.

▲ ▲복원 전시중인 하멜의 난파선 스페르웨르호
▲ ▲복원 전시중인 하멜의 난파선 스페르웨르호

용머리 해안을 돌아 나와 난파선 모형 스베르웨르호에 올랐다. 국제문화협회와 네덜란드 대사관이 1980년에 만든 기념관 아래 실물크기로 복원된 배다. 돛대와 용골의 위용이 대단했다. 선실에서 갑판으로 올라와 한동안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뱃머리 너머 텃밭에는 벌써 유채꽃이 한창이다. 300년의 세월을 넘어 이 땅에 남아있는 스베르웨르호의 의미는 무엇일까.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운명은 이 때 갈렸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하멜 일행의 쓸모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었다. 왜란에 유린되고 호란에 초토화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자체를 고민하지 않았다. '조선의 무지'를 마주해야 하는 고통스런 시간이다. 하멜의 체류는 아쉬운 기회의 낭비였다. 무의미한 억류로 끝이 났다. 나가사키는 뱃길로 이틀거리인데 사는 것은 문명과 야만이라고 증언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왜 역사를 되돌아보는가. 그때로부터 잘못된 것을 돌이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때문일 것이다. 해볼 능력도 없는 허울 좋은 '북벌'을 명분으로 당파싸움에 세월을 보내던 '하멜의 조선' 은 결코 오랜 과거가 아니다. 이제는 남들 앞에 먹고 살만해졌다고 자부하는 현재도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지도자의 실정과 오만으로 패싸움판이 된 이 나라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지금의 리더십은 17세기 중반 무능했던 조선의 판박이다. 차가운 하멜의 난파선속에 뜨거운 역사의 훈육이 숨어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