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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끝나지 않은 전쟁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2017년 01월 31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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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슬프다. 전쟁은 고통이고 죄악이고 아픔이다. 어떤 시대, 어떤 국가, 어떤 인간에게나 공통된 결과물이다. 잘려나간 육체의 죽음은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 그러나 영혼에 남은 상처는 강산이 바뀌어도 남는다. 질기고 처절하게 잔류한다. 죽이고 죽는 행위의 뒷모습이 인간세상의 역사이긴 하지만 그 아픔을 담고 살아야 하는 후대들의 삶은 간단치 않은 문제다.

오키나와는 아름답고 서정이 넘쳤다. 미치도록 푸른 바다, 남북 150킬로미터 종단 열대자연의 눈부신 해변, 타이완까지 이어지는 군도의 1600개 섬, 날마다 여름이 펼쳐지는 상하(常夏)의 나라,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류큐(琉球)왕국,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연결되는 고리. 남태평양이 시작되는 길목. 강수량은 적지만 지진이 없고 태풍이 비켜가는 천혜의 땅이다. 천년 동안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 파라다이스를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다.

태평양 전쟁(1938-1945)은 오키나와 사람 15만 명(당시 60만 인구의 25%)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이 한을 잊지 않고 있다. 원폭 두발로 항복했던 본토와 달리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다. 섬 중부 요미탄손으로 상륙한 미군 앞에 패전을 앞둔 군국주의는 결사항전에 나섰다. 희망이 끓긴 날 일본군 사령관 우시지마는 자결했다. 병사들과 현지인들이 그를 따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들이었다.

애꿎은 조선인은 여기서도 총알받이였다. 2만여 명이 징용 군부와 위안부 명복으로 끌려와 만 여명이 이리죽고 저리 죽었다. 평화공원 귀퉁이 조그만 위령탑은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이은상 시인의 추모서사시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한국인 추모 위령탑’. 그 바위덩어리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참담함이 밀려왔다. 고통스런 시대를 떠올려야 하는 원망과 자괴감 때문이리라.

▲오키나와 한국인 추모 위령 탑에서

오키나와 한국인 추모 위령 탑에서

오키나와 남쪽 이토만 시 마부니 언덕. 남태평양이 직선으로 내려다보이는 60만평의 광장은 끝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평화공원에는 정적이 흘렀다. 전범국이 만든 '평화공원' 이라니. 아이러니다. 죽음의 무게감으로 짓눌린 위령탑, 수평선으로 연결되는 대지는 애도와 한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중구조였다. 군국주의 칼춤 앞에 판단을 유보한 채 생명을 버려야 했던 절규가 남아있었다.

종전 무렵 치비치리가마의 동굴에 대피중이던 현지인 145명 가운데 85명이 자살로 생을 마쳤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훗날 세상에 알려졌다. 전쟁을 반대했던 일본인 조각가 긴조 미노루의 고발 작품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군대를 향한 분노와 두려움의 트라우마가 생생한 현장이다. “집단 자결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고 죽는 오명을 남기지 말라. 황국신민은 자랑스럽게 제국을 위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고. 야만스런 ‘행동요령’ 은 강제된 죽음 앞의 발가벗겨진 증거로 남아있었다.

동굴은 마지막 저항 기지였다. 나고(名護)시 남부 바닷가 800개의 동굴은 집단자살의 사연으로 얼룩져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를 감추기 위해 동굴들이 지도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미군에 밀린 일본은 육군과 해군, 보급대까지 전멸을 맛보아야 했다. 자살, 할복, 학살이 교본대로 자행되었던 시간이었다. 감추고 싶은 역사일수록 결코 감춰지지 않는 변증의 역설이 과거를 지키고 있었다.

강원도와 전라도 탄광촌 가난한 처녀들이 이곳에 끌려와 사탕수수밭에서 강제노동을 당하고 위안부로 살아야 했던 슬픈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비정하고도 야만스런 폭력을 목격하며 전율했었던 기억이 가슴속에서 일렁였다. (김정한의 다큐멘터리 소설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

▲오키나와 남쪽 이토만시 해안의 평화공원 (위 흰색이 위령탑)

오키나와 남쪽 이토만시 해안의 평화공원 (위 흰색이 위령탑)

“전쟁은 그 자체가 목적인가. 목적을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인간이 생사를 걸고 다투는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지배하는 영역인가. 역설적으로 결코 참거나 달성될 수 없는 본질을 위해 오히려 전쟁은 존재 한다” (‘전쟁론’ 클라우스제비츠.1780-1831). 정말 그럴까. 그렇게 고상한 언어로 포장하고 싶은 가해자들의 욕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은 공포와 분노, 참담과 회한이 잠드는 곳이다.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인간의 뒷모습이다” (‘하얀전쟁’ 안정효) 나는 후자가 더 정확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지배와 종속이다. 그것을 경험한 우리와 류큐는 알 수 없는 공감대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일본의 통치(1871-1945)와 미국 지배(1945-1972)를 지나온 그들. 가데나 공군기지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기가 오늘도 오르내리고 있었다. 철조망 울타리는 끝이 없다. 종전 17년 만에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여전히 미 태평양 공군 주력부대가 주둔중이다. 이제는 시가지가 되어버린 후텐마 기지 이전을 둘러싸고 일본정부와 오끼나와현은 대립이 날카롭다. 일본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그저 ‘류큐’ 이기를 원하는 그들이다.

골프와 휴양의 기대로 나하 공항은 떠들썩했다. 붐비는 한국인들의 머리속에 오키나와는 먹고 마시는 유희의 의미가 지배적인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증언지다. 오키나와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의 폭로로 시작된 일제의 만행은 여성인권을 유린한 현실문제로 세계적 비판을 받고 있다. 소녀상 갈등으로 아직도 일본 대사가 본국소환을 당하는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

천년 왕국 오키나와는 여전히 정체성을 고민 중이다. 이 땅은 조선인의 엄청난 희생으로 우리도 타의적 이해당사자다. 미국, 일본, 한국의 ‘다극적 갈등구조’ 가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이 아픔을 치유하려면 구체적 기억의 세대가 몇 번이나 흘러야 할 것 같다. 그 뒤 아주 오래 뒤 아련한 역사의 세대로 탈색된 뒤에나 가능한 영역이 아닐까. 20세기 중반을 피로 물들인 전쟁은 망령처럼 아직 오키나와를 떠돌고 있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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