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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상하이 와이탄의 올드재즈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기사 출고: 2016년 05월 19일 오전 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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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연기를 가르는 선율에는 구슬픈 역사가 물씬하게 배어있었다. 근대화 시절 서구 열강에 내어준 땅에 이식된 신식악기들은 어둠속에서 피어나는 들꽃처럼 뒤섞였다. 조차지에 번진 서양의 물결은 낯설고 어색했을 것이다. 상하이(上海)는 밤마다 나른한 재즈로 흥청거리며 눈물의 시간을 쌓아왔다. 페어몬트 호텔 재즈바는 그 시대의 중심이었다. 중국인들은 피스호텔(和平飯店)로 기억한다.

진스핑은 올해 86세다. 고교를 중퇴하고 70년째 상하이 와이탄(外灘)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그의 음악인생이 시작된 1940년은 상하이가 이미 유럽인들의 손에 넘어간데 이어 중일전쟁에서도 밀렸을 때다. 외국인들의 특별거주지로 치외법권지대가 설정되었다. 세계적인 호텔그룹 페어몬트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신 개척지인 상하이 황푸강 부둣가에 중세스타일의 고급건물을 지었다. 머지않아 이곳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명소로 변했다.

상하이 올드재즈클럼 멤버들의 나이를 합치면 400살이다. 현존하는 세계최고령 재즈악단인 셈이다. 맏형인 86세의 진스핑을 비롯해 78세의 피아니스트, 76세의 트럼펫, 79세의 드럼주자, 81세의 베이스까지 ‘400살 재즈단’은 아직 건재했다. 老재즈맨들은 오늘밤도 음악에 취해 와이탄을 뜨겁게 달궈주고 있었다. 중국의 현대를 보여주는 강 건너 푸동(浦東)의 네온 불빛과는 대조적이다. 동방명주와 세계금융센터는 중국굴기의 상징이다. 그 사이로 재즈의 슬픈 선율은 끝없이 흘렀다.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호텔 올드재즈단 연주와 함께.
▲상하이 페어몬트 피스호텔 올드재즈단 연주와 함께.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올드재즈는 ‘텐야거뉘(天野哥女)’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장아이링의 소설로 만든 영화 ‘색.계(色.戒)’에서 남자 주인공 양차오웨이(梁朝偉)에 반한 여인 탕웨이(湯唯)가 다다미방 주점에서 부르는 노래다. 참혹한 전란을 피해 도피하는 연인들의 애잔함을 담고 있는 중국인들의 ‘18번’ 이다. “사랑하는 당신은 바늘, 나는 한 가닥 실... 봄날 꽃피는 들판에서 몸짓하는 아련한 나비처럼 우리 그렇게 살다 끝내요” 언제 들어도 가슴이 흔들리는 명곡이다.

국민가수 덩리쥔(登麗君)의 레퍼토리 ‘月亮代表我的心’ 이 뜨는가 싶더니 이내 탱고로, 다시 칸초네로 요동을 친다. 밤은 깊어 가는데 빈자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초저녁부터 들어와 앉은 관객들이 떠날 줄을 몰랐다. 클럽 밖에서 서성거리며 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박수갈채에 동참했다. 올드재즈의 백미는 80대 진스핑의 솜씨다. 그 정도 나이면 호흡이나 기술적인 테크닉이 떨어질 만도 한데 벌써 두 시간 째 릴레이 연주중이다.

몇 년 전 프라하의 드보르작 뮤직홀에서 만났던 피아니스트 이반 모라비츠(85세)가 생각났다. 체코의 국민영웅으로 대접받는 노인은 제자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로 등장했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부터 40분짜리 쇼팽곡은 그의 손에서 완벽하게 요리되었다. 연륜과 삶의 깊이가 묻어나는 연주였다. 진스핑의 레퍼토리가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무대로 나가 감사의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떨어지는 감촉에 힘없는 노인의 손이다. 그 손으로 이런 연주가 가능하다니.

후반 세션에서는 재즈의 신으로 추앙받는 쳇 베이커(1929-1988. 미국 재즈음악가)의 ‘My Funny Valentine’ 으로 막이 올렸다. “쳇 베이커의 음악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난다. 가슴의 상처가 있고 내면의 풍경이 있다, 그는 이를 아주 자연스럽게 공기처럼 빨아들이고 다시 밖으로 내 뿜는다. 그의 연주는 시원하고 밝은 표층 아래로 침잠한 고독의 여운을 남긴다. 트럼펫 소리는 똑 바로 공기를 찌르고,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미련 없이 사라진다. 미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들을 둘러싼 벽으로 사라진다” 재즈 예찬론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백이다. 재즈는 우리의 인생처럼 고독한 내면의 이야기들을 풀어내준다.

▲와이탄의 초록건물 페어몬트, 강건너는 푸동지구다.
▲와이탄의 초록건물 페어몬트, 강건너는 푸동지구다.

시대는 아픈 역사를 안겨주고 갔다. 19세기 작은 어항이었던 상하이는 강제개방의 풍랑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열강의 무대였다. 거부할 수 없는 세력들은 이곳을 아시아 대표도시로 만들었고 1930년대에 이미 인구 100만을 넘었다. 1932년 상해 사변으로 유럽열강에 이어 일본군까지 와이탄에 진출했다. 황푸강 전면의 아르데코 건물들은 그때 생겨났다. 파리, 뉴욕, 베를린, 상 페테스부르크의 재현이었다. 중국식 장삼을 걸친 부유층들은 치파오 여인들과 사교댄스를 즐겼다.

피스호텔은 와이탄의 초록지붕으로 유명하다. 웅장한 외관 못지않게 내부는 이태리산 우유빛 대리석으로 디자인되어 품격을 더해준다. 1929년 지어진이래 이 클럽에는 수많은 명사들이 다녀갔다. 찰리 채플린과 버나드 쇼.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마오저퉁(毛澤東)과 국민작가 루쉰(魯迅)도 자주 들렀었다. 일제에 쫓기면서 고단한 독립운동을 하던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곳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으로 돌아가 그 현장을 보는 느낌이다.

세상은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다. 그 속에서 보석 같은 생각과 추억을 만들어 내는 일은 역시 재즈나 예술의 몫이다. 그것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숭고하다. 진스핑 같은 올드재즈 음악인들은 언제까지나 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되면 그들의 연주를 보기가 힘들어지겠지. 이들이 떠나면 다음세대가 다시 피스호텔의 밤을 밝힐 것이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갈 것이다. 장자의 이야기다. “백구과극(白駒過隙), 인생이란 문틈을 통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백마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이 삽시간에 지나가 버린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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