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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쑤저우, 은이 만들어준 제국의 심장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기사 출고: 2016년 05월 03일 오전 10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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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본과의 전란에 시달릴 때(임진왜란) 중국 쑤저우(蘇州)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중소형 가내 수공업이 성업을 이뤘다. 직기 수 십대씩을 갖춘 직물업소가 일만 이천 여 곳에 달했다. 베를 짜고 물레를 돌리고, 염색을 하던 직공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흥청거렸다. 16세기 성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호경기였다. 1567년 은이 중국으로 몰리던 시절 양쯔강(長江)하류 비옥한 삼각주에는 물자가 넘쳐나고 읍내는 점차 성 밖으로 힘차게 뻗어 나갔다.

그 자취를 찾아 나선 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내가 모두 물로 연결되어 일찍부터 동방의 베니스로 이름난 고을답게 거미줄처럼 얽힌 수로(水路)는 백미였다. 좁은 선착장에서 값을 흥정하고 올라탄 소선(小船) 뱃머리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나뭇잎 배는 사공의 솜씨에 미끌어지듯 날렵하게 협수 안쪽을 빠져나갔다. 작은 노는 중국 아낙네들이 나물 씻고 빨래하는 물가로 거침없이 길을 만들어 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고 한 이유를 알만하다. 소동파는 강남에 와서 쑤저우를 돌아보지 않으면 평생의 후회가 된다고 적고 있다.

명나라 만력제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은(銀)의 유입은 경제를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당시 쑤저우는 실크를 만드는 총본산이었다. 은을 돈처럼 결재하는 상품화폐경제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중화의 중심지 저장성(浙江省)과 장쑤성(江蘇省)에만 연간 37톤의 물량이 소진되었다.

독일의 경제사학자 앙드레 군터 프랭크(Andre Gunde Frank 1929-2005)는 명저 ‘리오리엔트’ 를 통해 서양 중심 경제사학자들의 서술에 여러 번 경종을 울렸다. 16세기 중반(1545년)부터 18세기 말(1800년)까지 전 세계 백은(白銀) 생산량은 13만 7천 톤이었다. 이 가운데 6만 톤(44%)이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그야말로 전 세계 은이 모이는 배수구였다. 그 대부분이 쑤저우를 중심으로 부가 축적되었다는 사실을 서양에서는 애써 무시한다는 것이다. 250년간 6만 톤이면 연평균 240톤의 막대한 양이 장강하류로 들어온 것이어서 세계사의 시각을 바꿔야 할 정도다.

은을 주고 구입한 물자는 황제의 도시 베이징으로 운반되었다. 통로는 항저우와 쑤저우, 베이징을 이어주는 경항대수로.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복구 작업이 진행중이다. 중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옛 수로를 잇겠다는 계획이다. 장장 1800 킬로미터 거리다. 16세기 실크단지로 찬란했던 산탕지에(山塘街) 풍교지구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즉석식품과 즐비한 상점들이 뒤엉켜 실크의 추억은 낯선 허기로 포개져 버렸다. 골목을 지나 아치형 다리가 보이는 물가로 내려가니 나룻배 여러 척이 한데 모여 있었다.

▲실크수공업 중심지였던 산탕지에 입구에서.
▲실크수공업 중심지였던 산탕지에 입구에서.

쑤저우는 문자로 기록이 전해진 지난 4천년동안 수많은 나라와 영웅호걸이 교차해갔다. 기원전 317년 북방의 유목민들이 쳐들어오자 한족 상류층은 남쪽으로 피난을 갈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쑤저우 인근 도시 난징(南京)에 동진(東晉)을 세웠다. 이후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신화를 거쳐 중국왕조에서 강남의 제일가는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경제는 물론 빼어난 경치는 시대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쑤저우 시내의 물길은 창랑정과 졸정원, 유원 등 200여개의 정원을 아름답게 연결해준다. 독일 사람들이 마음먹고 투자한 진지호반(金鷄湖畔)의 캠핀스키 호텔과 36홀 골프장은 도시의 현대적 세련미를 더해준다. 자연경치는 진귀한 보물이고 여기에서 걸출한 인재들이 수없이 탄생했으니 가히 ‘인간천당’ 이라 할만하다. 왕가의 패밀리와 귀족들이 노후 최고의 거처로 꼽아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동양의 베니스답게 시내가 물길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동양의 베니스답게 시내가 물길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오(吳)왕 합려(闔閭)는 월(越)왕 구천(句踐)의 공격으로 숨을 거뒀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섶나무에서 잠을 자며 이를 갈았다. 힘을 키워 복수를 다짐한지 몇 년 만에 부차는 월을 공격해 구천을 사로잡았다. 포로가 된 구천은 3년간의 노예생활을 견뎌야 했다. 본국으로 보내진 구천은 쓸개를 씹으며 응징을 다짐했다. 월은 다시 오를 정복하고 절대강자로 여겨졌던 부차는 최후를 마친다. 부차가 구천에게 패한 이유는 미인 서시를 보내 유혹한 공이 크다. 신하 백비를 잘못 믿은 까닭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전하는 주인공들이다.

오를 정복한 구천은 대부격인 범려(范呂)를 환대했다. 그러나 범려는 홀연히 떠나 제나라로 가버렸다. 새를 잡으면 천하의 명궁도 불쏘시개가 되고 교활한 토끼를 잡으면 충실한 사냥개도 한 그릇의 보신탕으로 삶겨지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범려와 달리 문종(文宗)은 끝까지 구천의 곁에 있다가 그의 의심을 사서 결국 처참하게 죽고 만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토사구팽(兎死拘烹), 서시(西施), 삼국지 오나라 손권의 스토리는 모두 쑤저우에서 2200년 전에 일어난 일들이다.

부차가 아버지 합려를 묻어둔 호구(虎丘)에 올랐다. 3천자루의 보검과 200명의 산 사람을 함께 순장시켰다는 기록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고민스런 대목이다. 천인석의 연못과 전각으로 꾸며진 호구정원은 고요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중국 남부지방의 명물 태호석이 기품 있게 배치되어 있다. 계단 위쪽에서 중심이 기울어진 사탑을 마주했다. 오나라 왕 합려를 기리는 벽돌탑이다. 저 허술한 탑이 천년을 견뎌왔다니 불가사의한 시간이다. 피사의 사탑처럼 점점 기울어져 철골지지대 수 십 개가 무너지는 세월을 받쳐내고 있었다.

▲오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쑤저우시내 호구의 벽돌탑.
▲오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쑤저우시내 호구의 벽돌탑.

1990년 등소평은 개혁개방을 지향하면서 쑤저우에 국가 하이테크 기술지구를 만들었다. 1997년에는 아태지역 과학기술공단을 세웠고 쑤저우 오동경제지구와 쑤저우 쉬수관 개발지구, 쑤저우 공업원구, 쑤저우 첨단기술지구등 6개 의 국가개발구를 조성했다. 현재 쑤저우의 부(富)는 이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쑤저우 공업원구는 삼성타운이다. 반도체와 전자 공장들이 밀집해있어 천안 탕정과 아산 같은 분위기였다. 1,2차 밴드사와 중소기업들도 대거 진출해 있다. 시내 후판광장은 이미 코리아타운으로 명소가 되었다.

은이 사라지고 수 백 년 동안 곤궁했던 쑤저우는 중국 공산당의 결단으로 영화를 되찾았다. 산업의 쌀 반도체와 전자통신업단지가 연달아 성공을 거두면서 잃었던 국부는 다시 쑤저우에 집중되고 있다. 그 전선에 우리의 삼성그룹과 한국인들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역사는 정말 알 수 없는 드라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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