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힐러리, 텐징, 아파. 에베레스트 세 남자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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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힐러리, 텐징, 아파. 에베레스트 세 남자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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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역이기를 거부하는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의미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다. 눈이 사는 곳이니 만년설의 집이다. 8천 미터 고봉들의 으뜸인 '초모랑마'는 '대지의 여신'이라는 의미다. 네팔인들은 옛날부터 '사그라마타(여신들의 거처)'로 불러왔다. 사철 눈보라속에 일체의 생명을 거부하는 무념의 땅, 그곳은 원래 속세와 인연이 없었던 신의 영지였다.

이 전설의 땅에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은 수많은 희생을 치룬 뒤였다. 1856년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정복을 위한 측량작업을 하다가 지구상 최고봉 초모랑마를 발견했다. 주인공은 영국의 측량국장 조지 에베레스트였다. 삼각측정법으로 높이가 8500여 미터에 달한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보고되었다. 초모랑마는 이때부터 에베레스트라는 낯선 이름으로 바뀌어버렸다.

당시 국력의 척도는 지구 최고봉 먼저 차지하기였다. 영국과 독일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가장 높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강대국들은 앞 다퉈 선점 대열에 나섰다. 기회는 영국에게 먼저 찾아왔다. 1953년 4월26일 영국은 대규모 원정대를 보냈다. 대영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최초 등정자는 반드시 영국인이어야 한다는 전제아래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다. 그러나 등반대에는 식민지 뉴질랜드 출신이 한명 섞여 있었다. 에드먼드 힐러리였다.

원정대를 도와줄 세르파는 무려 359명이 동원되었다. 15kg이 넘는 산소통을 운반하고 수많은 대원들의 뒷바라지가 이들의 임무였다. 비행기로 40분 거리인 카트만두에서 루크라 쿰부까지 모든 장비를 등짐으로 메어 날랐다. 그 세르파 가운데 정상을 먼저 밟은 사나이가 있었다. 텐징 노르가이다. 아내가 떠준 두툼한 양말을 신고 딸이 건네준 색연필을 수호신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닌 짐꾼이었다.

1차 원정대의 거듭된 실패 뒤에 2차 대원 힐러리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세르파 텐징을 지목해 한 팀으로 정상공격에 나섰다. 텐징은 묵묵히 힐러리를 따랐다. 선두의 힐러리가 어느 순간 크레바스에 빠졌다. 영화 '히말라야' 에서도 그려졌지만 크레바스에 빠지면 스스로 살아나기는 불가능하다. 지상에 가장 가까이 남은 대원이 몸에 엮인 로프를 잡아당겨줘야 가능하다. 그 로프는 텐징이 쥐고 있었다. 자일을 끓어버리면 힐러리만 희생시키고 텐징은 쉽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사투 끝에 힐러리를 살려냈다. 그 순간 둘은 얼싸안고 하나가 되었다.

▲ 에베레스트 최초등정 당시 힐러리(왼쪽)와 텐징(오른쪽).

1953년 5월29일 새벽 6시30분. 에베레스트 마지막 코스 12미터 직벽을 오르는 힐러리의 시야에서 텐징이 사라졌다. 숨이 멎는 호흡곤란과 눈보라속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영국 사람이 먼저 고지를 밟아야 한다는 최초의 목표는 불가능해졌다. 이를 악물고 정상 입구에 기어 올라간 순간 힐러리는 그를 기다리는 텐징을 발견했다. 텐징은 기쁘게 말을 건넸다. "친구 어서 오게. 30분이나 기다렸네". 그들의 눈빛은 육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뜨겁게 교차되었다.

"힐러리 나는 세르파라네. 우리에게 정상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어. 이 모든 봉우리가 정상이지. 먼저 올라가게. 난 언제라도 또 올수가 있지". 텐징은 힐러리를 밀어 올리듯이 정상에 서게 했다. 역사는 힐러리를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정상에 선 힐러리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대신 텐징의 사진만 전해오고 있다. 사진기를 꺼내 든 힐러리가 텐징의 사진만을 남겼다. 카트만두 영국대사관 기자회견에서 쏟아진 수많은 질문은 "둘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느냐" 였다. 두 사람은 "끝까지 함께 했다" 라는 말만 남겼다.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을 하루 앞두고 이뤄진 쾌거였다. 힐러리는 대영제국의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영웅이 된 친구에게 텐징은 "만약 정상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나는 그런 부끄러움을 안고 살 것"이라며 힐러리의 최초 등정을 암시했다. 세월이 흘러 텐징이 운명(1986년)을 달리 한 뒤 힐러리는 고백했다. "텐징은 위대한 세르파다. 그는 나에게 미련 없이 정상을 양보했다". 두 사람의 우정이 없었다면 인류는 산에 대한 도전의 역사를 좀 더 미뤘어야 했을 것이다.

▲ 쿰부의 텐징 노르가이 동상앞에서.힐러리가 남긴 사진을 그대로 재현.

두 영웅의 우정은 3대로 이어졌다. 힐러리의 아들 피터 힐러리와 텐징의 아들 잠링이 한 팀으로 에베레스트 등정(1998년)을 시도한 것은 국제적인 뉴스거리였다. 힐러리의 손자 데이비드 헤드먼과 텐징의 손자 타쉬는 할아버지들의 숭고한 개척정신을 이어받자며 새로운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준비하고 있다.

힐러리의 남은 인생은 가난한 히말라야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매년 25만 달러를 모금해 쿰부에 보냈고 병원과 학교, 공항이 세워졌다. 슬픈 일도 있었다. 히말라야 봉사활동 길에 올랐던 아내와 딸을 비행기 사고(1975년)로 잃었다. 자신과 가족을 바쳐 일생의 업을 달성해낸 셈이었다. 힐러리는 88살(2008년)에 뉴질랜드 오클랜드 고향 바닷가에서 숨을 거뒀다. 남겨진 그의 재산은 재혼한 부인과 살던 해변의 목조주택이 전부였다. 힐러리는 "죽은 뒤 나를 히말라야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파 세르파(Apa Sherpa. 1960-)는 에베레스트를 21번이나 올라간 기록 보유자다. 남극과 북극에 이어 지구의 제3극지 정상을 가장 많이 밟은 장본인이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년 4월 에베레스트 꼭지점에 섰다. 출중한 세르파 아파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미국 유타에서 지내다가 힐러리의 사망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곧 바로 짐을 챙겨 오클랜드로 날아갔다. 바닷가에 뿌려지고 남은 힐러리의 유골 절반을 받아들고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대원 두 명이 죽는 고통을 무릅쓰고 정상에 올라 힐러리의 유해를 설원에 뿌렸다.

▲ 아파(왼쪽)의 21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길.

세르파족의 대표적인 산악인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네팔 국왕으로부터 훈장도 받은 아파는 현재까지 힐러리 추모에 앞장서고 있다. "그가 없었다면 가난한 네팔 세르파들에게 병원도 쿰부의 학교도, 루크라의 공항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유언을 실천하고 세르파들의 은혜를 대신 갚을 수 있어서 너무나 감격스럽다"는 아파의 회견은 긴 여운을 남긴다. 세상 사람들은 "겸손한 영웅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곳에 잠들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에베레스트는 인류 알피니즘의 역사다. 히말라야를 떠나면서 전설 같은 세 남자의 숭고한 우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한없이 뭉클해져 왔다. 비행기는 구름위로 솟아오른 히말라야의 영봉들을 오른쪽으로 지나고 있었다. 네팔 국경을 넘을때까지 나는 인간의 우정을 아름답게 채색해낸 아파의 고백을 몇번이나 떠올렸다. "산은 수시로 바뀝니다. 아무리 같은 길을 가더라도 산은 다른 길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인생의 운명같은 길이지요.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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