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네팔 세르파, 500년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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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네팔 세르파, 500년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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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다림 끝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규모나 운영 면에서 우리 지방도시 터미널 정도지만 분위기는 활기로 넘쳐났다. 땀 냄새와 카레향이 섞인 듯한 독특한 향취 속에 공항은 소음과 인파로 떠들썩했다. 건물을 빠져 나오니 생김새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물이 수려한 그는 펨바 세르파였다. 목에 꽃을 걸어주면서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귀빈이 오면 갖추는 예의란다. 네팔 국화 랄리구라스로 엮어 만든 꽃 목걸이였다. 진한 향기를 머금은 단단한 꽃봉오리들이 보석처럼 목을 감쌌다.

펨바는 앞으로 2주 동안 네팔을 떠날 때까지 나와 함께 길을 가는 도반이다. 영어는 물론 한국어도 가능한 마음씨 좋은 아저씨다. 펨바의 고향은 카트만두에서 두 시간 떨어진 시골마을이다. 보리와 감자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들이었다. 어려운 살림을 박차고 나온 곳이 바로 수원의 어느 공장. 네팔 노동자 송출사업에 참여해 한국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9년 만에 자그마한 땅을 살 정도의 밑천을 마련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뉴질랜드로 유학 보냈고 지금은 히말라야를 찾는 사람들의 가이드를 하고 있다.

그의 조상들은 16세기 초 티벳을 넘어왔다.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제국을 세운 몽골 세력이 점차 쇠퇴해 중국과 종교적 갈등을 빚을 무렵 동티벳 캄파부족 일파가 남부 히말라야 쿰부 계곡에 자리 잡았다. 설산 중턱 빙하지역이다. 세르파는 세르(sher.동쪽)와 파(pa.사람)의 합성어다. 즉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다. 500년 동안 탐세르쿠와 콩데 부근 해발 3천 미터 이상 고산에 흩어져 농사를 짓거나 야크를 키우며 생활해오고 있다. 쿰중과 쿰데는 이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조나단 닐-세르파 히말라야의 전설)

펨바는 카트만두에서 에베레스트 코스가 시작되는 루클라로 떠나는 날 새벽부터 내 숙소(야크 앤 예티 호텔)로 찾아와 두 명의 다른 세르파 포터들과 분주하게 짐을 챙겼다. 눈이 유독 크고 천진한 미소가 특징이다. 히말쿰부를 찾는 한해 2만 여명의 방문객들은 이들의 눈동자를 유난히 사랑한다. 세르파족의 순수함은 사상과 인종을 초월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모두 세르파와 동행해야 한다. 네팔정부가 만든 일종의 규칙이다. 히말라야 등정은 신의 영역이다. 그들은 사그라마타 여신의 대리인들로 안전한 산행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 에베레스트 가는길. 팍딩에서 펨바와 함께.

펨바의 풀네임은 펨바 세르파다. 태어난 요일마다 정해진 이름을 붙여주는 부족의 전통에 따른 작명이다. 월요일은 다와, 화요일은 밍마, 수요일은 라크파, 목요일은 푸르부, 금요일은 파상, 토요일은 펨바, 일요일은 니마다. '펨바 세르파'는 토요일에 태어난 세르파 아이라는 뜻이다. 산악인들의 영웅 박영석의 세르파는 '앙 도르지 세르파' 였다. 젊은(앙) 번개같은(도르지) 남자(세르파)다. 노르부-귀인, 소남-복덩이, 텐징-진리수호자, 칼첸-승리자 같은 이름이 많다. 여자는 페마-연꽃, 걀모-여왕, 데키-건강, 라모-여신 같은 이름을 즐겨 붙인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동명이인이 많다.

"라이는 짐을 지고 구르카는 군대 가고 세르파는 산으로 간다". 네팔 속담이다. 100개 종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국가여서 각 부족의 역할은 비교적 선명하다. 세르파는 힘들고 위험한 환경속에서 용감함과 정직성, 근면 성실, 충성심 등으로 뭉쳐 히말라야 등정개척사의 한축을 이루고 있다. 1909년 노르웨이 원정대참여가 시작이었다. 인도와 국경지역 다즐링에서 농사를 짓던 그들이 짐꾼으로 발탁되면서 고산 안내 역사의 막이 올랐다. 1953년 텐징 노르가이의 에베레스트 정상정복은 세르파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 텐징 노르가이 동상공원, 뒷쪽 왼편으로 에베레스트가 보인다.

텐징은 세르파의 영웅이자 네팔의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를 도와 인류최초로 지구의 꼭지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주인공이다. 세계인은 그를 기억한다.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가는 중간지점, 남체에서 팡보체로 이어지는 길목에 얼마 전 텐징의 동상과 공원이 조성되었다. 탐세르쿠와 아마다블람이 보이는 히말라야 뷰 포인트다. 텐징은 유명인이 되고 나서 다즐링에 등산학교를 세웠다. 세르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힐러리의 손녀 애밀리 힐러리와 텐징의 손자 잠링 텐징 노르가이가 3대째 우정을 맺고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른 뉴스는 감동이었다. 텐징이 사망한 1986년 전 세계 미디어는 칭기스칸, 공자, 석가, 간디, 마오저뚱과 함께 텐징을 ,아시아의 위대한 6인'으로 평가했다.

파상 라무는 가장 유명한 세르파 여인이다. 1993년 네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하산길에 사망한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도로와 벼 품종에 이름을 붙여 지금까지 추모하고 있다. 파상의 남편 락파 소남 세르파는 탐세르쿠 트래킹 회사와 예티 항공사를 소유한 네팔의 갑부다. 현재 활동 중인 유명인은 밍마 세르파다. 네팔인 최초로 히말라야 8천 미터 이상 14개봉을 완등했다. 2011년 칸첸중가를 마지막으로 대업을 달성했다. 네팔 최초, 세계 24번째 기록이다.

50대 중반인 펨바는 이제 다리가 약해져 고산에 오르는 것을 조금 힘들어 했다. 리상 텐디 세르파와 지옌 세르파 두 명은 언제나 내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주었다. 리샹은 18살 소년이다. 어릴 때 사고로 왼손가락 네 개를 잃었다. 원정 내내 따뜻한 미소로 나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준 친구다. 40킬로그램의 짐을 띠로 묶어 이마에 매고 아침마다 먼저 묵묵히 길을 나선다. 맨몸으로도 사경을 해매는 나를 언제나 앞질러 오른다. 우리 일행의 앞뒤에는 좁교나 야크에 쌀과 음료수를 동여매고 고산을 오르는 다른 세르파들도 함께 움직였다.

▲ 히말라야 원정길 친구들. 왼쪽부터 리썅, 지옌, 펨바

히말라야 등반 갈증에는 '산 미구엘' 맥주 한 캔이 일품이다. 그 캔맥주 10상자를 이마에 메고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어린 세르파와 쉬는 곳마다 마주쳤다. 운명 같은 오름이다. 그가 4식구의 소년 가장이라니 저 가냘픈 등에는 가족들의 목숨이 함께 올라타고 있는 셈이다. 오르고 다시 내려가고 내일도 모레도 또 오른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건들이 세르파의 등에서 등으로 이어져 고지에 옮겨진다. 롯지에서 즐기던 캔맥주를 다시는 못 마실 것 같다.

땀으로 범벅된 오름의 고통은 오직 라마교 진리로 이겨낸다. 지금의 고행은 내세의 행복이라는 믿음의 진리. 히말라야에서 길은 곧 종교다. 마을 마다 곰파(사원)와 초르텐(불탑)이 서있고 하늘을 뒤덮는 롱다(오색 천을 줄에 매달아 내건 깃발), 마니(종처럼 돌리는 경전)가 즐비하다. 네팔은 힌두교가 국교지만 세르파들은 티벳 라마교가 생명이다. 주요길목 큰 바위에는 어김없이 '옴마니반메훔'이 산스크리스트어로 조각돼 있다. 돌에 새겨진 경전들은 세월과 풍우에 씻겨 희미해져 간다. 그러나 이들은 조상들이 남긴 유물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마을 어귀에 함께 쌓아 놓는다. 누구나 태어나서 108장의 옴마니 경을 만든다. 백팔번뇌를 이겨내려는 종교의 가르침이다. 부자가 되는 사람은 초르텐을 짓고 사원을 증축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룬 모든 업보를 라마교와 함께 한다.

▲ ▲짐을 부리고 쉬는 세르파 지옌. ▲남체 입구 바위에 새겨진 옴마니 반메훔.

등정 5일째 해발 4천 미터 중턱에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의 쓰러져 있었다. 고통과 갈증으로 숨이 넘어갈듯 하다. 눈 덮인 설산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펨바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고산병 때문에 지난밤 가벼운 구토 증세를 겪었다는 사실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속도를 낼 때마다 펨바는 조금만 더 천천히 가라고 충고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도쿠가와 이에야쓰)"고 했던가. 산이나 인생이나 가는 길이 험하고 끝이 없음은 마찬가지다. 다시 일어서는 순간 펨바는 또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아직 영혼이 따라오지 못했어요. 속도를 늦추고 그때까지 기다렸다 같이 가요"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m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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