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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히말라야의 카프카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기사 출고: 2015년 12월 07일 오후 4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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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발걸음은 땅거미가 내려올 무렵 나를 히말라야 첫날밤으로 안내했다. 부어오른 발목과 숨이 넘어갈듯한 지독한 피로속에 타는 갈증까지 앙상블로 내안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새벽부터 쉬지 않고 계곡을 오르면서 한계를 알 수 없었던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았다. 역시 시작과 끝이 잡히지 않는다. 루크라(Lukla.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지역 중심지) 산중턱 50미터 짧은 오르막 활주로에 곡예사처럼 내려앉은 경비행기에서 배낭을 메고 일어섰을 때부터 이미 침묵은 시작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끓임 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폭풍과 비슷하다. 나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듯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내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꾼다. 나는 다시 또 모래폭풍을 피하려고 도주로의 방향을 바꿔버린다. 그러면 폭풍도 다시 나를 향해 방향을 바꾼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치 날이 새기 전에 죽음의 신과 얼싸안고 불길한 춤을 추듯 그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인생이다”

연극으로 세계를 누비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작 ‘해변의 카프카’ 한대목이 폐부를 찌르며 다가왔다. 어쩌면 나 또한 15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저 멀리 만년설이 두텁게 쌓인 설산에는 하얗고 고운 눈바람이 운명처럼 세차게 날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정어리가 쏟아지는 3시간 연극이 끝나고 내 눈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네팔로 떠나오는 동안 줄곧 카프카는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폭풍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폭풍은 내 자신이다. 내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다. 그곳에는 어쩌면 태양도 없고, 달도 없고, 방향도 없고. 어떤 경우에는 제대로 된 시간도 없다. 거기에는 백골을 분쇄해놓은 것 같은 하얗고 고운 모래가 하늘높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다."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해발 3100미터 팍딩 고갯길에 창공을 수놓는 몇 마리의 군무다. 생명이 말라버린 땅에 그려지는 수채화 같다.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다. 들짐승 이름의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신세계를 흔들어 놨다. 나또한 ‘변신’이나 ‘성(城)’, ‘유형지에서’를 통해 받은 영감이 평생을 지배하는 날카로운 언어가 되었다. 모래폭풍 같은 서울을 피해 도망쳤는데 내 도주로를 다시 히말라야 카프카가 막아섰다. 고산에서 날아오른 까마귀는 질긴 생명의 표본처럼 뚜렷하게 줄을 그으면서 내 시야의 왼쪽에서 오른쪽을 관통했다.

▲ 히말라야 남체에서 아마다블람 가는길.
▲ 히말라야 남체에서 아마다블람 가는길.

루크라에서 8시간동안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히말라야 쿰부지역은 광대한 바다 같았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봤던 그 광활한 바다. 600미터 계곡 아래로 흐르는 두드코시 강과 모든 산들이 낮은 화폭에 수평으로 담겨 있다. 장단과 고저가 모두 없어진 채로 비가 내리는 바다.

무거운 짐을 지고 앞서가는 세르파의 발걸음이 애처롭다. 야크와 말, 좁교(야크와 물소의 교배종. 고산적응이 뛰어난 동물), 사람들이 엇갈리며 오가는 차마고도(茶馬古道) 산길은 천년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 발밑의 돌과 소똥을 구별하는 일은 일종의 참선 같은 과업이다. 그렇게 모두다 카르마를 안고 오르고 있다. 세상에 업을 쌓는 것이 사는 것이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다. 이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시지프스의 신화’ 같은 반복으로 버텨내려니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견딜 수가 없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온 몸의 숨구멍을 열어 심산의 정기에 노출시켰다. 지금부터 백년이 흐른 뒤를 생각해본다. 그때쯤이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지상에서 사라져 먼지나 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것들이 허무한 환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려 당장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올라가야 하고 또 살아가야 되는 것일까.

절벽사이 석청이 매달려 있는 몬조를 지나고 조살레 체크포인트 계곡을 오르면서 나는 줄곧 생각에 잠겼다. 나는 자유인가? 현실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자유에 대해 의도적으로 생각을 겹쳐 보았다. 그러나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는 이내 와 닿지 않았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이다. 혼자 모르는 낯선 곳에 와있다. 지도의 거친 표시 어느 점 부근에 고독한 탐험가처럼. 자유란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그 같은 사실조차도 잘 모르겠다.

▲ 쿰중에서 가깝게 보이는 아마다블람.
▲ 쿰중에서 가깝게 보이는 아마다블람.

황량함은 생명이다. 만상은 황량함에서 출발했다. 히말라야는 찾는 이들에게 그런 반전을 안겨준다. 내 시선으로 담아 들이는 순간 수많은 봉우리들은 팔딱거리는 생명으로 재탄생해 저장되었다. 남체 오른편으로 손에 잡힐 듯한 아마다블람(Ama Dablam. 6812. 어머니와 진주목걸이라는 의미. 마차푸차레, 스위스 마테호른과 함께 세계3대 미봉)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나를 따라 다녔다. 낮에는 조각품 같은 우아함으로 트래킹을 안내하고 밤에는 희미한 흔적으로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다. 롯지에서 잠 못 이루던 어느 새벽 창가에 비친 아마다블람 한쪽에 초생달이 걸려 있었다. 다시 생명을 채우는 때였던 것이다. 왼쪽으로 서있는 캉데카(Kangdeka. 6782.말안장 모양을 닮은 봉우리)직벽은 또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산은 고독하다. 본질적으로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다. 제쳐뒀던 명제들이 하나씩 솟아올라 고개를 내민다. 사람들은 누구나 많은 상처를 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여행을 결심한 것은 내심 히말라야 여신에게서 마음의 치유를 얻고자 함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진정한 치료는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새로운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이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며 눈을 뜬 둘째 날 새벽녘 나는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이들의 체취가 베어있는 낡은 침대 위에 생선구이처럼 들어 있었다.

“우리의 삶이란 끄덕끄덕 졸다가 깜빡 깨어나고 다시 끄덕끄덕 조는 것이다”. 프랑스의 현대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 Lacan.1901-1981)의 진단이다. 인간은 현실이 견딜 수 없어 늘 꿈을 꾼다. 저것만 얻으면 더 이상 소망이 없겠지, 그러나 그것을 얻으면 순간 깨어난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이 스르르 미끄러지는 것을 발견 한다. 텅 빈 손을 참을 수 없어 그들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도 라캉의 진단처럼 그날 아침 또 히말라야의 남은 길을 재촉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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