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초가 맺어준 서귀포 2천년 우정
상태바
불로초가 맺어준 서귀포 2천년 우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http://www.cstimes.com

2015.11.03

 

 

불로초가 맺어준 서귀포 2천년 우정

 

 

풍랑은 잠잠했다. 항구를 떠난 배들은 남쪽으로 항진했다. 백 척이 넘는 선단이다. 이 천 여명이 대오를 나눠 동진하였다. 단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인원과 배가 바다를 향해 본적이 없는 역사상 초유의 도박이었다. 정확한 지도나 전략도 없이 가능성 하나에 희망을 걸고 신선들이 산다는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선 길이다.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러 떠난 서불(徐市. 서복으로도 알려져 있음)과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은 그렇게 서귀포에 닿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두 나라의 우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으로부터 높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2200년 전의 일이다. 그는 의학, 천문, 지리에 능하였다. 황제에 충성할 길을 찾던 서복은 불사불로(不死不老)의 명약이 동쪽 신비의 섬에 있다고 알현했다. 진시황은 즉시 명을 내려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했다. 하지만 고대에 거친 바다를 건너던 배들이 온전했겠는가. 풍랑과 공포를 넘어 오랜 항해 끝에 도달한 곳이 탐라국이었다. 신화속 영주산(한라산)에 불로초가 없는 것은 불문가지. 돌아가서 험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눌러앉아 사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일행은 그렇게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북송(北宋)의 시인이었던 구양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서복은 진의 백성을 꾀어내어 약초를 캐러간다고 동남동녀를 데려다 그곳에서 늙게 했다. 온갖 장인과 오곡을 주어 살게 했다".

영생의 꿈에 젖은 진시황은 돌아오지 않는 서복을 원망하며 기원전 220년 사구평대(砂丘平臺)에서 죽음을 맞았다. 찌는듯한 여름 7월 사막에서의 최후였다. 아방궁과 천하통일의 주인공이 부린 불로의 과욕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후한서는 진시황이 지독한 일벌레였다고 전한다. 건강을 위해 수은을 복용한 것이 과로와 겹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시체는 소금에 절여진 채로 생선 상자와 나란히 왕궁으로 돌아왔다. 덧없는 마침표였다.


          
                            ▲서귀포 서복공원 앞마당의 진시황제 동상


서귀포(西歸浦)는 서복이 서쪽 중국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정방폭포 절벽에는 서불과지(西市過之. 서불이 다녀갔다)라는 한자가 돌에 새겨져 있다. 조선왕조의 미움을 받아 제주에 귀양중이었던 추사 김정희가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서귀포 용담근처 산지항 바닷가에서는 전한시대의 화폐인 오수전과 화천, 대천오십 등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화포와 구리거울도 출토 되었다. 서귀포에 한동안 머물던 서불 일행은 다시 남해를 거쳐 일본 사가현까지 흘러갔다. 후쿠시마, 후쿠야마, 후쿠이 등의 일본성은 서복의 이름자(福. 후쿠)에서 왔다고 믿고 있다.

지난 9월 한.중. 일 사학자와 향토 연구가 300여명이 제주 하이얏트 호텔에 모였다. '서복의 문화실크로드 규명을 위한 연구회'다. 전설로만 전해오는 불로초 이야기를 자세히 연구해서 세 나라의 좋은 문화유산으로 발전시켜 보자는 취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토론회가 마무리되었다. 또 참석자 전원이 서복공원을 돌아보았다. 내년 총회는 일본의 사가현에서 다시 열기로 했다.

진나라 서복의 함대는 지금의 저장성 닝보(寧波)에서 떠났다. 시진핑 주석은 저장성 공산당 서기를 지냈다. 이세기 위원장(국회부의장. 한중우호협회장 역임)은 2005년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에게 서복의 불로초 이야기를 전했다. 시진핑은 이튿날 곧바로 제주도를 향했다. 이미 장쩌민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등이 다녀간 뒤였다. 장 주석이 남긴 서복공원 시호는 오늘도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중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다. 시 주석은 취임 후에도 한국의 고위급 인사를 만나면 서복이야기를 꺼내며 건배를 제의한다.

 

            
                           ▲정방폭포 옆 서복공원 전시관 입구에서. 필자


서복은 제주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수 백 명의 한족들이 날마다 그를 찾아 서귀포를 찾는다. 흩어진 기록을 모으고 구전의 이야기를 분석해 만든 전시관에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고 돌아간다. 진시황의 병마가 끄는 구리수레는 특히 눈길을 끈다. 해풍을 견뎌온 육중한 소나무 숲 사이로 서귀포 남쪽 바다가 출렁인다. 진시황의 동상이 그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유커들의 셔터가 쉬지 않고 터지는 곳이다.

중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운명적 관계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백성들의 마음을 은밀하게 소통시키는 묘약이다. 현실정치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는 길은 문화 속에 잠겨있는 부드러운 소재들이다. 역사는 만드는 이들의 것이다. 고증을 거쳐 전시물들을 늘리고 시설도 확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전시관을 돌아 나오는 길에 잔디마당에서 서성이던 다섯명의 중국 대학생들 사진을 찍어주었다. 진시황과 서불은 이렇게 서귀포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투데이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