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율 브린너. 블라디보스토크의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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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율 브린너. 블라디보스토크의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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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웠다. 강렬한 눈빛과 구릿빛 피부는 물론이고 패기와 정열의 화신으로 각인된 느낌. 무모하지만 그냥 따르고 싶었던 젊은날의 우상, 동양과 서양을 잘 버무려 놓은 듯한 묘한 분위기.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흠모했었던 매력적인 대머리 율 브린너(1920-1985)의 생은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되었다.

항구가 바라보이는 낮은 언덕. 지금은 아파트로 변해버린 바닷가 중턱에 정겨운 동상 하나가 나를 반겼다. 멀리 루스키 섬으로 이어지는 대형 현수교가 내려다 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부동항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민족과 전쟁의 소용돌이가 무섭게 일렁이던 1920년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토록 유명한 할리우드 명배우의 고향이라고는 쉽게 생각해내지 못한 반전이었다.

작열하는 남성미로 데보라 커를 압도했던 영화 '왕과 나(The Kimg and Me)'는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영국작가 마가렛 랜던의 소설 '애나와 시암의 왕'을 각색해 만든 히트작이다. 은둔제국 시암(태국)의 라마 후예 몽꿋왕은 밀려드는 제국주의 파도 앞에 정세를 파악하고자 미모의 서양 가정교사 데보라 커를 궁정에 들여놓는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우정과 애정, 이성사이의 카리스마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으로 율 브린너는 1956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뮤지컬로까지 만들어져 35년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4350회를 출연했다. 예술사에서 전무한 기록이다.

▲ 젊은날의 율 브린너. 그가 출연했던 영화 '황야의 7인' 한 장면.

동방정책을 밀어부쳤던 러시아 황제 짜르의 해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번성시켰다. 소년 율 브린너의 '극동 공화국' 시절이다. 그러나 허망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안중에도 없었던 일본함대와 단 한판의 해전에서 무참하게 깨졌다. 러일전쟁 패전의 아픔은 훗날까지 오랫동안 견뎌내야 했던 상처였다. 해군박물관에는 비극의 유물들이 제국의 황혼처럼 남아있었다. 다음 전쟁(2차 대전)에서 독일을 괴롭혔던 잠수함이 국가영웅 칭호를 받고 나란히 자리해 그나마 피끓는 슬라브 청년들의 자존심을 달래주고 있었다.

율 브린너의 아버지는 보리스 브리너(1889-1947)는 광산업자였다. 브린너는 브리너에 알파벳 'N"을 섞어 발음이 편하게 개명한 이름이다. 어머니는 루마니아계 집시 출신 러시아 배우였다. 보리스는 대한제국의 벌목권을 따낸 사업가였다. 그의 부친이 우리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조선말 압록강의 무성한 산림벌채권을 확보한 보리스는 목재와 광산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페테스부르크에서 광업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떠나고 율 브린너는 어머니를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했다가 거기서 다시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문제는 율 브린너의의 할머니였다. 할아버지 율리(Ulli)는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 6남매를 뒀다. 그 할머니가 몽골계였다. 대머리 명배우의 혈통은 로마와 몽골, 독일, 스위스, 루마니아, 러시아, 중국인들의 피가 뒤섞여 만들어진 작품인 셈이다. 손자가 할아버지 '율리'의 이름을 '율'로 이어받았다. 이 시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는 혼란했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100여개 민족이 흥망을 거듭하며 지난한 역사를 이뤄왔다. 그 배경에서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블라디보스토크 언덕 먼바다를 응시하는 율 브린너 동상.

태어난 집터에 우뚝 올라간 아파트 벽에 동판이 새겨져 있었다. 안내하던 러시아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자랑스러워 했다. 앞마당 동상에 젊은 시절 그의 얼굴이 되살아나 있었다. 연해주 한인들이 일본압제에 맞서 싸울 때 조선인들과 섞여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가 겨울산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던 사진은 할리우드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생가터를 지나 내리막길은 항구로 이어졌다. 광장 한쪽에 레닌의 동상이 남아 있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붉은 혁명의 잔재가 모두 사라졌는데 드문 일이다. 편협하지 않은 극동 사람들의 정서 덕분이다.

"나는 다양한 혈통 속에 태어났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가장 멋지고 튼튼한 몽골청년으로 기억되는 것을 희망한다. 내 몸속에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초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왕과 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십계, 아나스타샤 등 주옥같은 영화들이 모두 성공을 이룬 뒤 밝힌 그의 본심이다. "사람을 잡아 먹을듯한 카리스마" 는 몽골 혈통에서 왔을 것이다. 서부영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황야의 7인' 에서 율 브린너는 찰스 브론슨,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같은 개성파 배우들을 완벽하게 압도했다.

율 브린너는 폐암으로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고 살든지 절대로 담배는 피우지 말라" 고 절규하며 죽어갔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티끌 같은 것이다. 대륙을 넘나들면서 피고 지고 다시 알 수 없는 어느 한 점으로 회귀해 돌아갔다. 그는 프랑스 투렌의 성 로버트 묘지에 묻혔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오갈 수 없었던 시절, 그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감춰져 있었다. 조선 사람들과의 짧지 않은 인연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가을로 깊어가는 극동의 하늘은 눈속에 우수가 짙게 배어있는 죽은 사나이를 생각하게 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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