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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우수리스크의 들국화. 최재형

김경한 justin747@cstimes.com 기사 출고: 2015년 10월 05일 오후 1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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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북방의 짧은 계절은 들판의 생명 축제를 재촉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해주 평원을 향해 떠난 지 두시간만에 끝없는 지평선 한가운데 내렸다. 이미 가을해가 기울고 있었다. 바람에 들꽃들이 살랑거렸다. 사학자들의 고증을 더듬어 평원의 가장자리 ‘솔빈부’(率濱府. 조선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 터를 둘러보았다. 발해의 5경15부 가운데 하나였던 유적지다. 말을 키워 기마대를 만든 현장이다. 그 시대 말은 병마의 중추였다. 짧은 여름 동안 풀을 먹이고 살찌워 다시 전쟁터로 보냈던 출발지였다. 제국의 기상이 살아 오는듯한 느낌이다.

이런 조상들의 발자취 때문이었을까. 조선말 기근을 피해 유랑하던 함경도 경원지방의 주민 16가구(1867년 7월)는 솔빈부 터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인의 연해주 진출 시작이었다. 우수리스크(Ussuriysk. 늪지대)라는 지명부터가 고단함을 예고했지만 이들은 3년 만에 벼농사를 지어냈고 마을을 일궈나갔다. 목숨 걸고 노력한 끝에 30여 년 만에 연해주의 버젓한 읍내를 만들어냈다. 훗날 독립운동의 최전선으로 떠오른 곳이다.

최재형(崔在亨. 1858-1920)은 연해주 항일투쟁사의 정신적, 물질적 기둥이었다. 동포들을 가난에서 탈출시키고 재결집시켜 엄청난 항쟁을 이끌어 냈다. 일제와 세계를 놀라게 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노인동맹단 강우규 열사의 도시락 폭탄사건, 이상설, 이준의 헤이그 밀사파견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권업회와 동의회를 만들고 고려일보와 동방꼼뮨을 인쇄 배포했다. 1906년에는 조선13도 의병군을 창설했다. 들국화처럼 꿋꿋한 저항이었다.


▲ 우수리스크 시내의 최재형 거주 가옥과 그의 생전 모습
▲ 우수리스크 시내의 최재형 거주 가옥과 그의 생전 모습


그는 노비와 기생사이에 태어났다. 9살 때 기근을 피해 연해주 핫산 크리스카노로 이주했다. 두만강을 건너온 유민의 자식이었다. 신천지도 배고픔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11살 가출 소년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때 현장을 지나던 러시아인 선장이 없었더라면 ‘최재형 파노라마’도 없었을 것이다. 선장부부는 영특하고 부지런한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6년 동안 선원생활도 주선했다. 상트 페테스부르크까지 수차례 항해하며 일기를 쓰고 조선의 국제관계에 대한 지평을 열어나갔다. 러시아 군인맥의 도움으로 군수물자와 운송업에 뛰어들어 거금을 쥐게 된 그는 자만하지 않고 다시 우수리스크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다.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을 보내고 안중근의 옥바라지를 끝까지 해냈다. 연해주를 노리던 일본의 눈의 가시였던 그는 결국 1920년 4월 학살에 희생되었다. 조선의병과 러시아인 600명을 규합해 시가전을 벌이던 중 일본군에 잡혀 생을 마감했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후 연해주 빨치산 운동을 동시에 전개했던 최재형의 독립투쟁 역사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다가 최근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서거 95년 만에 그의 위패만이 현충원으로 돌아왔다. 늦었지만 감개무량한 일이다.

“연해주 벌판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평원의 초목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철새들이 줄지어 노을 지는 하늘로 날아갔다. 그는 생각했다. 돌아갈 수 없는 조국,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다. 가난한 산동네 고향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붉은 의지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역사소설가 이수광의 ‘대륙의 영혼 최재형’) 그의 본명은 최 뽀뜨르 세메뇨비치였다. 그런데 ‘최 빼치카’ 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하다. 고달픈 조선인들의 ‘빼치카(따뜻한 벽난로)’ 역할을 자임한 숭고함이 서려있는 애칭이다.


▲ 독립유적지로 정부가 구입한 최재형의 옛 집 앞에서.
▲ 독립유적지로 정부가 구입한 최재형의 옛 집 앞에서.


주인 잃은 빈집 마당은 타르로 구운 비료자(자작나무)전봇대 하나가 지키고 서 있었다. 키를 넘는 잡초와 포도넝쿨이 무너져가는 처마를 받치고 있었다. 독립유적지 보존차원에서 정부가 사들였지만 아직 보수되지 않아 을씨년스러웠다. 뒷벽에 태극기와 동판이 없었더라면 폐가나 다름없었다. 우수리스크시 블라다르스코보 38번지. 시내 메인도로변이다. 대저택은 독립자금 마련으로 다 팔아치우고 이 초라한 집에서 마지막 1년을 보냈다.

최재형의 곁에는 늘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 있었다. 헤이그 밀사로 다녀온 뒤 인생 모두를 걸고 싸웠던 거인이다. 잊혀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국내와 현지 고려인 사회가 나서서 수이푼 강변에 비석을 세웠다. 얼마 전의 일이다. 임종을 앞둔 이상설은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대신 유골을 강물에 뿌리면 흘러 다니다가 어디선가 조국의 독립을 보겠다고 했단다. 늦여름 수해에 떠내려 온 갈대더미가 비석 하단에 가득 쌓여있었다. 동해로 흘러드는 우수리강의 지류다. 돌비석에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했다.

먹고 살만해진 연해주의 이민사는 1936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무참히 깨져버렸다.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는 열흘 동안 수 천 명이 죽어나갔다. 모두 17만 명이 떠났다. 배고픔과 질병으로 첫해 7천명, 이듬해 4천명이 고인이 되었다. 비극의 정거장 라즈돌리나 철도역은 아직 그대로였다. 화물차가 통과하는 철로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나라 잃은 백성은 가축만한 대접도 받지 못했다. 아프고 괴로운 과거를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감당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우수리스크는 20만이 넘는 연해주 주요도시다. 소련이 해체되고 1995년부터 옐친의 도움으로 타슈겐트 일대 고려인들이 다시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60년만의 일이었다. 우정마을은 3만 여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고려문화센터를 세우고 연해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가난하지만 동포사회의 정신은 골격을 잃지 않고 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탐독하며 그렸던 연해주의 현실은 무거웠다. 과거의 상처 속에 갇혀 지내는 고려인들과 국경을 넘어와 장사를 하는 중국 조선족, 날품팔이로 떠나온 북한주민들, 현대 한국의 꿈을 이루려 오가는 서울사람들이 서로 다른 기억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상처만큼은 모두의 공집합이다. 고려인들과 최재형의 항일투쟁사는 한국인의 영혼을 불타오르게 하는 질긴 에너지이다. 끝내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우수리스크의 빛나는 유산이다. 그 기대는 뭔가 허전해 오는 가슴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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