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는 또 다시 떠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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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는 또 다시 떠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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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2

 

 

막차는 또 다시 떠나는데

 

 

어린 시절 만화는 내 상상의 나래였다. 주인공은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다니는 세상은 기본이고 단신으로 복수혈전의 승리자가 되는가 하면 현재 벌어지는 3차원 세계를 이미 다 맛보게 해주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나서는 만화를 멀리했다. 좀 허접한 문화의 변방 같기도 하고 깊이가 떨어진다는 예단이 문제였다. 논리의 재구성을 필요로 하는 저널리스트의 직업상 손이 잘 가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고백일 것이다.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 은 이런 편견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지루하고 건조한 사서 관리들의 기록 전체를 그림과 지문으로 다시 살려낸 그의 솜씨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읽다가 덮고, 생각나면 필요한 부분만 간헐적으로 기웃거리던 조선의 역사가 한눈에 쏙 들어오는 느낌이어서 다른 어느 책보다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태조의 건국부터 고종의 망국까지 파노라마가 한 번에 이어지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종합적인 느낌은 무거웠다. 몇 명을 빼고 대부분의 상감마마들은 너무나 무능했다. 핏줄과 서열을 둘러싼 세력 쟁탈전, 음모와 살인의 시나리오를 달고 다니는 당쟁으로 오백년의 세월이 부족했다. 어린 임금을 볼모로 벌어지는 친척과 외척의 살육전은 왕조마다 통과의례였다. 우리 편이 아니기에 죽여야 했고 그 가족들까지 씨를 말리고 나면 또 새로운 임금으로 무대가 교체되고 같은 대본의 재탕이 이어졌다.

유능한 신하는 죽거나 귀양으로 망가졌다. 간신들은 임금의 무력함을 업고 활개를 쳤다. 바깥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예 관심에도 없었다. 백성들의 피를 빨고 기름지게 지내는 것만이 일상의 목표였다. 그렇게 우수한 유학자와 선각자들이 세상을 등지게 만들었다. 그런 삶이 마치 선비정신인 것처럼 선양한 것은 오늘의 후손들이 조선을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퇴행적 행태였다.

영국은 18세기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해 이미 산업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의 선택이 영국과 미국을 200년 강자로 만들었다. 우리보다 수준이 낮았던 일본은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으로 20세기 주인공이 되었다. 대국굴기에 나선 중국의 성장속도는 눈이 부시다. 세상의 흐름에 먼저 올라탄 나라들의 힘은 치욕과 굴욕을 동반하는 법이다. 당할 만큼 당하고 나서야 잠깐 정신 차린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조선의 잘못된 선택과 무지가 가져온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남들이 2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혁명을 우리는 단 30년 만에 끝내야 했다. 남들이 100년 이상 허비한 민주화를 우리는 최단으로 압축해서 따라잡아야만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은박지에 싸서 버리고 싶은 비통하고 치욕스런 순간들은 이미 잊은 것 같다. 미안하지만 글로벌 무대는 흐름을 먼저 읽은 강대국들의 구상대로 흘러가고 있다. 웬만큼 살만해졌으니 우리도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추격전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것도 숨이 차다. 이제는 기업도 국민도 지쳐가고 있다. 그렇다고 세상은 우리가 기력을 회복 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적당한 아량과 기다림 대신 약육강식만이 있을 뿐이다. 산업 혁명에서 뒤쳐진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고 이룩한 결과가 이것이라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선택을 발 빠르게 준비해야 한다.

후기 산업사회의 막차가 떠나고 있다. 정보혁명이 끝나고 새로운 경제혁명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다. 과거에는 무식해서 기회를 놓쳤다지만 이제 다시 세상의 흐름을 놓치면 변명거리도 없다. 베껴서 맨발 추격전을 승리로 장식했으니 그 저력으로 선도대열에 서볼 때가 되었다. 역사상 이정도의 탄약과 보급품을 확보한 적이 없었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2차 산업혁명의 열차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티켓을 쥐려면 버려야 할 유산들이 너무 많다. 아직도 권력을 둘러싼 지저분한 거래와 막가파식 대결구조, 냉소주의가 이 시대를 지치게 하고 있다. 경제와 미래 고민으로 밤을 새도 모자랄 판에 한국의 배는 산으로 가고 있다. 언제까지 리더들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백성들이 온몸으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손가락질 하는 아베는 일본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지도력과 리더십은 그 국가의 주관적인 문제다. 명분과 실리 사이를 서성이는 우리에게 죽비와 같은 충격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아직도 우리의 혈관 속에 숨어있는 조선의 당파적 그림자와 천형을 벗겨내야 한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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