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증권사 보고서 '한글파괴' 편집국 바로잡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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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증권사 보고서 '한글파괴' 편집국 바로잡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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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슈머타임스 김수정 기자] '펀더멘탈' '벨류' '이머징마켓' '디레버리지' '모멘텀'

'향후 추가적인 인프라투자를 통해 2017년에는 성도급 도시주민들의 인터넷 사용속도를 30mbps로 높이고 핵심도시 주민들의 속도는 100mbps로 늘릴 계획이며 4G망이 도시와 농촌에 모두 개통되고 모바일인터넷 침투율은 중등소득국가에 달해야 한다고 함.'

'FOMC' 'PER' 'EPS' 'PBS' 'RPK' 'ASK'

21일 국내 대형 증권사 몇 곳의 보고서에 실제로 쓰인 내용들이다.

상응하는 우리말 표현이 있는데도 굳이 영어표현을 쓴다. 한 문장에 서술어를 3~4개씩 넣는가 하면 필요한 문장성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기도 한다. 생소한 두문자어에 국문을 우선 병기해주는 친절함은 기대하기 힘들다.

대강 훑어봐도 이 정도다. 맘먹고 빨간 펜을 들면 금세 너덜너덜해질 판이다.

하루에만 수십 부씩 쏟아져 나오는 국내 증권사의 각종 보고서가 부적절한 외국어 표기로 얼룩지고 있다. '성장에 가속이 붙는다'고 하면 될 걸 '모멘텀이 강화된다'고 표현한다. '신흥 시장'이라는 깔끔한 우리말을 두고 '이머징 마켓'이라고 쓴다.

구태여 영어 독음을 한글로 쓰겠다면 외래어 표기법은 지켜주는 게 기본일 터. '펀더멘탈'이 아니라 '펀더멘털'이고 '벨류'가 아니라 '밸류'다. 그렇지만 밸류와 벨류가 한 문단에 뒤섞여 있는 보고서가 버젓이 인쇄돼 배포된다.

한 문장에 3~4개의 서술어가 들어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문장은 부지기수, 비문은 애교다. '핵심도시 주민들의 속도는 100mbps로 늘릴 계획'이라는 이상한 계획이 나온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전문용어'를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툭툭 던져놓는 건 예삿일. 'FOMC 의사록을 보면 두 지표가 중요…'라며 관련 분석 내용을 풀어놓으면서 'FOMC'가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를 의미한다는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보고서를 읽는 사람의 상당수는 많은 전문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 없을 것"이라는 증권가의 입장도 어불성설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조차 가끔은 어처구니 없다는 지적이다. 굳이 생소한 단어들을 나열하듯 써 내려갈 필요도 없거니와 수준 높은 정보를 다루는 보고서에서 오기와 비문이 빈발하는게 말이 되냐는 것.

엄연한 출판물인 보고서의 품위를 증권사 스스로가 지키고 나설 때다. 작은 실천에서 신뢰가 쌓인다.

무심하게 'PER'이라고 쓰는 대신 '주가수익비율(PER, Price Earning Ratio)'이라고 써주는 배려에 고객들은 감동한다.

조만간 편집국을 설치한다는 한 증권사가 모범 사례를 만들 수 있을 지 눈여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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