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장미의 이름. 멜크 수도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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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의 세상이야기] 장미의 이름. 멜크 수도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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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도원 살인사건' 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성서의 예언대로 사제가 죽어나가니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공포로 중세유럽이 침묵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그 시대를 관통하던 신권(神權)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역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숀 코넬리의 명연기는 백미였다. 수도원의 미스테리를 풀기위해 스코틀랜드 식 망토를 뒤집어쓰고 주로 야밤과 새벽에 동분서주하는 사제의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남는 수작이었다. 무대가 된 이탈리아 토리노의 생미쉘 성당 모습은 화면의 무게감을 더해줬다. 비밀로 묻힐 뻔했던 사건이 멜크 수도원의 사제 아드소의 기록으로 남아 유럽을 변화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그로부터 줄곧 멜크 수도원은 궁금증의 대상이었다. 이탈리아의 천재작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의 '장미의 이름' 은 내 호기심에 더욱 불을 붙였다. 9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은 소설이라기보다 다큐멘터리 종교기록으로 이해되었다. 에코 역시 사건이 일어난 이탈리아 피에몬테 산중(피사에서 산티아고에 이르는 순례자들의 길)에 있었다는 수도원과 멜크를 수없이 오가며 장서를 뒤지고 옛 흔적을 발견하려 땀을 흘렸다. 영화로, 소설로, 사람들의 구전으로 알려진 멜크는 한해 3백 만 명이 찾는 오스트리아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비엔나에서 하루를 묵고 여장을 챙겼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호반 할슈타트에서 이틀을 더 보내고 심신을 가다듬은 뒤 멜크로 향했다. 자동차로 한 시간 만에 비옥한 토지의 중심지 바카우에 도착했다. 합스부르크 이전 왕가였던 바벤베르그 왕조의 수도였던 소도시. 그곳을 지켜온 수도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다뉴브강변의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황금빛 벽채와 견고한 첨탑. 중세의 암울했던 수도원 이미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럽최대의 바로크 양식 수도원답게 입구부터 웅장함과 섬세함이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발코니에 서서 푸른 벌판과 유유히 흐르는 다뉴브강변을 내려다보았다. 평온한 시골이다. 낮은 산들과 기름진 평야는 천년이상 이곳 귀족사회의 젖줄이었다. 더불어 수도사들의 안식처였다. 지금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와인 산지다. 끝없는 포도원은 지평선을 두 개로 가르고 있었다.

멜크 수도원은 1089년 최초로 베네딕트수도회의 수도원으로 건축되어 1297년 대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다. 14세기 들어 복원이 이뤄졌고 1683년에 다시 파괴되었다. 재차 1736년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오스트리아 멜크 수도원 앞마당에서

'장미의 이름' 은 살인이 이어지는 7일 동안의 기록이다. 첫 번째 시체는 항아리에 거꾸로 박힌 채 발견된다. 두 번째는 낡은 욕조에 퉁퉁 불어 떠오르고.. 모두가 장서에 관심을 가진 젊은 사제들의 희생이었다. 아델로, 베난티오, 베렐가리오, 세베리노. 죽음은 요한묵시록(신이 죄로 가득 찬 세계를 파괴하고 신심이 깊은 자들을 구원하며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우주적 역사적 비전을 서술한 성경)의 예언대로다. 수도원은 종말이 오고 있다며 공포에 휩싸이고 결국 교계전체가 나서 수사가 이뤄진다.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그를 수행하는 아드소와 함께 조사의 임무를 띠고 문제의수도원에 도착했다. 살인은 묵시록대로 벌어지고 사건의 열쇠를 쥔 책은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마침내 미궁을 헤치고 거대한 암호를 풀어낸 윌리엄은 어둠속에서 수도원을 지배하는 광신의 정체를 만난다. 의문의 지하 서고를 예의주시한 것이다.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늙은 사제 호르헤는 바짝 마른 양피지 서책에 불을 붙이고 그 자신도 수도원 건물과 함께 불타 버린다.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 잿더미가 되는 순간이었다. 비밀서책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편'. 이 책을 보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거기에 뿌려진 독이 침을 묻히는 손가락으로 죽음을 불렀던 것이다.

사제 아드소의 기록은 우리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신권이 지배하던 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되었던 사실이 이성이 회복된 지금 새로운 판단을 요구하며 다가온다. 우리시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의 희망이나 기대로부터 먼 이야기일수 있다. 이단과 필사, 갈등과 심판이 반복되는 스토리다. 살인사건은 신앙의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교회의 오만이 묻어있다. 모순과 기호의 관계를 풀기위해 어디론가 사라지는 지혜의 강을 찾기 위해 해매지만 우주의 질서가 없음을 깨닫지 못한 인간의 비극만이 남았을 뿐이다.

아드소의 기록 원본은 볼 수가 없었다. 서고로 내려가는 지하 2층 길은 막혀있었다. 10만권의 장서와 2천종의 필사본은 14세기 이후 이 수도원의 자랑거리다. 하지만 그저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책이 없는 수도원은 재산이 없는 도시, 군대 없는 성채, 그릇 없는 부엌, 먹을 것 없는 밥상, 풀 없는 뜰, 꽃 없는 목장, 잎 없는 나무 같은 것이다. 공부하고 기도하라" 그 시대 수도원이 지혜의 보고인 이유를 알려주는 수사다. 육중한 대리석 기둥을 지나 긴 회랑들을 살펴보았다.

▲ 지하2층. 서고로 내려가는 복도에서

애초부터 사건은 없었다. 아집에 갇힌 늙은 수도사가 가짜 그리스도 역할을 하면서 페러독스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허위와 복종을 강요하는 비밀주의 중세교회의 그림자를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한다고 했는데 쓸모는 있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도그마가 중세 교회를 망가지게 했다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에코는 어떤 결론도 주지 않고 탄식했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장미는 실은 우리의 모습이다. 아침이 되어 만개했다가 이윽고 시들어버리는 허무를 보라"

장미의 이름은 21세기 최고의 기록소설로 전 세계 60개국에서 3천만부가 팔려나갔다. 영적희열과 종교적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장미는 어린양의 순결한 피를 상징한다. 욕망으로 덮인 탐욕과 권력 다툼, 부패가 .바로 그 벌레 먹은 장미를 은유한다. 입으로는 청빈과 성스러움을 주장하면서 안으로는 금으로 치장하고 민초들의 피와 땀을 주님과 장미의 이름으로 갈취하며 죽지 않을 만큼만 허기를 때우며 살아가라고 한다. 그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마녀사냥은 공포와 복종을 강요한다. 수도사 아드소는 모순을 밝히고자 했던 윌리엄의 불씨를 이어받아 참회에 나서고 이는 결국 종교개혁으로 연결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치관,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한 가치관이나 신념들이 모여 사회가 만들어지고 인간은 완성되어 간다. 그러나 그 신념들이 모두 나에게로만 향하게 한다면 그것은 오만과 독선이다. 중세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 왜곡된 신념을 강요했다. 그 결과 다툼과 분열 끝에 모든 게 소멸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중세의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우리 모두는 광막한 사막으로 들어간다. 오래지 않아 동등(同等)과 부등(不等)이 존재하지 않는 적막과 화합과 절멸의 나라, 하늘의 어둠에 든다. 이 심연에서는 인간의 영혼역시 무화(無化)하며 동등함과 부등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차이가 잊히고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분별이 없고 깊고 깊은 바닥에 내려앉는다. 수고도 없고 형상도 없는 무인지경의 적막한 신성(神性)에 든다. 죽음이다.

그 끝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려드는 관광객들은 수없이 카메라를 누르고 무리지어 이동하며 알 수 없는 언어들로 수도원을 가득 채웠다. 여름으로 가는 태양이 강렬하게 마당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천주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류보편의 진리와 불멸의 성사(聖事)를 찬미한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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