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다 야스나리. 설국. 유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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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다 야스나리. 설국. 유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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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업이 슬프다. 인간이라는 그것, 아름답기 때문에 슬프고 슬프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래서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없었던 것일까. 가스관을 물고 자살로 생을 마친 이유가 지금껏 궁금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43년 전 최후 모습이다. 고아처럼 자란 쓸쓸했던 어린 시절, 군국의 망령들이 춤추던 전쟁의 포화, 낙엽처럼 스러지는 생명들. 그 지경에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 것이다. 영혼 속에 얼룩진 상처를 지우려면 죽음만이 유일한 대안이었을까. 이승의 무거운 짐과 고뇌를 털어내기 위해 최선의 방법으로.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명작이라는 이유로 내용도 모르고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희미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소설의 첫 문장속 에치코 유자와역에 내렸다. 도쿄에서 1시간 반을 달렸다. 군마와 니가다를 가르는 구로베 협곡을 지나서야 얻은 선물이다. 20킬로미터가 넘는 시미즈 터널을 나오자 '설국(雪國)' 은 소설이 아닌 현실로 내 앞에 나타났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은것이다.

밤 기차 차장에 비친 반대편의 고마코는 처음부터 시마무라를 흔들리게 했다. 하지만 끝까지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만나고 응시하고 다시 찾아오지만 지루하리만큼 고백은 없다. 좋아하는 남자의 이름을 20명만 쓰겠다면서 그녀는 정확히 스무 번 '시마무라' 를 썼다. 미루어 두 사람의 애정을 짐작할 뿐이다. "온다고 했으니 왔고 간다고 했으니 가야죠". 무채색 사랑에 지친 고마코의 말은 인생 그것이다. 가슴밑바닥에 눈이 쌓이듯 그녀의 소리를 듣는 시마무라가 바로 작가 그 자신이다. 둘을 통해 시대와 인생의 허무가 진하게 베어난다. 행간 사이사이로 아름다운 게이샤가 그려지는 것이 '설국' 의 백미다. 눈벌판과 여인과 허무의 수채화 풍경처럼 말이다.

1931년부터 그가 가끔 머물렀던 다카한 료칸(高半旅館)에 들어섰다. 800년 풍상을 이겨낸 목조건물이다. 2층 다다미방에 남겨진 낡은 탁자에 앉아 보았다. 소설을 쓰던 그 책상과 주전자, 화로가 가지런히 나를 감싼다. 2미터 이상 쌓인 눈은 한 층을 메꾸고도 남아 이층 유적 집필실을 넘보고 있다. 오픈 터널로 연결된 눈길이 딴 세상 같다. 내려다보이는 흰 평원은 北彩(북채. 눈고장 일본 북방의 색채)의 절정이다. 엄청난 적설량은 겨울 내내 유자와를 포로처럼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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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코가 아들의 약혼녀, 아들의 새 애인 요코, 그러나 결핵인 아들이 얼마못가 죽는다면.... 사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맴돈다. 모든 게 헛수고라고 여기는 시마무라지만 헛수고일수록 오히려 순수하게 보이는 그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다가서고 있다. 아들과 요코가 불속에 사라지고 울부짖는 고마코를 보면서 은하수를 생각했다. 자신의 그림자가 지상에서 은하수에 거꾸로 비춰지는 모습을 보았다. 은하수가 그의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 은하수가 흰 눈으로 변했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다카한 창 너머 석양의 유자와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비추는 것과 비춰지는 것의 이중노출. 우뚝우뚝한 설산들이 이뤄내는 맑은 조화다. 눈 녹이는 온천수가 길을 내는 도로를 따라 유자와역까지 걸었다. 거리의 목조건물들은 하얀 솜이불을 둘러쓰고 겨울잠에 빠져있다. 길은 좁아지고 휘어지다가 결국 협곡사이로 사라졌다. 소설 속 고마코는 찹살 떡과 팥 과자의 이름으로 모습을 바꿔 아직 유자와에 살아있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불속에서 타오르는 연인의 마지막이 은하수로 마무리 되는 것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였다. 순간순간 덧없이 타오르는 여자의 아름다운 정열.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소구하는 시물라르크에 불과할 뿐 결국 되돌아와 자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만이 진실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얗게 지워지고 감춰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 최승희를 최고의 춤꾼으로 여기고 자랑했던 가와바다는 '이즈의 무희'를 세상에 내놓고 생의 끝을 향해 달려 나갔다.

불행한 대문호의 생애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자와 읍내는 젊은 스키매니어들로 넘쳐났다. 사케에 취한 이들의 발걸음이 어지럽다. 모이고 흩어지는 겨울벌판 또 하나의 기차가 설원속으로 사라졌다. 좁은 시야로 월광이 파고 들었다. 차가운 겨울하늘에 걸린 달빛은 처연했다. 밤이 지나고 새벽에는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약속처럼 퍼붓고 모든 것들을 서서히 묻어버렸다. 세상에 지친 사람들이 어디쯤에선가 반드시 멈추리라는 것을 아는 신호처럼.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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