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꼬. 조선통신사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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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꼬. 조선통신사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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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스기(杉.삼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것 같다. 쭉쭉 뻗어 올라간 기상이 예사롭지 않다. 섬나라의 혼이 깃든 나무로 오랫동안 귀하게 여겨왔던 신목(神木)이다. 조락을 알리듯 잎들이 지고 화산분출로 생긴 재 넘어 쥬젠지호수(中禪寺湖)에서 불어오는 물바람 끝이 매섭다. 도쿄에서 두 시간 거리 울창한 숲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진 닛꼬(日光) 국립공원의 산중턱 끝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사당이 있었다. 혼란한 천하를 통일해 일본 최초로 중앙집권국 면모를 갖춰낸 막부(幕府)정권의 시조다.

영웅을 기리기 위해 도쇼쿠(東照宮)를 짓고 청동관에 유해를 안치했다. 그의 손자 이에미쓰는 연인원 180만 명을 동원해 이 기념비적인 사당을 만들고 할아버지를 모셨다. 도쿠가와를 역사적 인물로 숭상하는 일본인들은 해마다 300만 명 정도가 이곳을 다녀간다. 아사쿠사에서 도부닛꼬행 기차를 타고 들렀다가 근처 기누가와 온천을 돌아가는 길이 방문코스다.

도쇼쿠를 자랑하기 위해 불러들인 최초의 외국사절단이 조선통신사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국교를 복원한 1607년 이후에도 조선은 여러 번 사신을 보냈다. 그중 3번의 통신사 행차가 닛꼬를 거쳐갔다. 인조14년(1636) 임광(任框)을 대표로 475명, 인조21년(1641) 윤순지(尹順之) 일행 462명, 선종6년(1655) 조형(趙珩)등 488명이 도쇼쿠에 머물다가 에도로 들어갔다.

이 같은 사실은 제임스 클라벨의 역사소설 '쇼군'과 야마오카 소하치의 베스트셀러 '도쿠가와 이에야쓰(대망(大望)으로 번역보급)' 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인조 20년(1640) 2월 일본 일광산(日光山)에 사당이 세워져 편액과 종을 보냈다. 임금은 일광(닛꼬)을 효(孝)를 중시하는 곳으로 삼아달라는 의미의 편액을 들려 보냈다"

조선종만 보내기가 부족했던지 삼구족도 같이 짐꾸러미에 실었다. 불가에서 중히 여기는 향로와 촛대, 화로다. 금박으로 요란하게 치장된 도쇼쿠 본당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수소문해봤지만 인조가 보냈다는 삼구족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조선종은 400년의 세월을 오롯이 견디어 기품 있는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았다. 푸르스름한 청동 표면에 '조선종(朝鮮鍾)'이 뚜렷하게 양각돼 있었다.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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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양국관계는 태종4년(1404)에 맺어졌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조선은 일본을 너무 몰랐다. 양국은 선린사절단을 교환하기로 했다. 조선에서는 통신사가 일본에서는 국왕사가 파견되었다. 13번의 조선통신사는 험한 바다를 건너 기항지 쓰시마를 시작으로 힘겨운 육로여정을 거쳤다. 그래야 목적지 에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하일기가 보여주는 명나라 사신길 못지않은 고행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잠깐 끓긴 때를 빼고는 250년이나 이어졌다.

지난 국회 때 외무통일위원장 박진 의원이 '조선통신사' 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한일의원 외교로 확대시키기 위해 닛꼬에도 여러 차례 다녀갔다. 민간의 뜻있는 이들이 모여 뮤지컬이나 드라마를 만들자는 시도도 진행 중이다. 두 나라의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조선통신사는 귀중한 정치, 외교, 문화적 유산이라는 인식을 공유한 결과다.

일본역사가들 중에는 조선왕이 동종(銅鐘)을 도쇼쿠에 헌납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의 힘이 두려워 조선이 외교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고 서술한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편협함과 왜곡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역사를 부정하고 영토적 신경전을 집요하게 펼치는 일본을 상대로 얼마나 아량을 베풀고 인내해야 하는지 회의를 가지는 국민들이 많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하면서 발전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고도 조선통신사는 파견되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이웃 일본을 대하는 우리선조들의 자세였다. 17세기 피비린내 나는 전란에도 불구하고 통신사와 일왕사가 오고간 것은 대단한 용서와 화해였다. 지금 국제회의장에서도 서로를 외면하는 양국 정상을 대하는 것은 고통이다.

대의는 소의를 품는다. 어려운 때일수록 대문을 열어야 한다. 만나고 마주해야 문제가 풀린다. 글로벌 외교상황은 두 나라의 긴밀한 협조를 주문하고 있다. 등을 돌리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두 나라의 숙명이다. 허물을 덮어두고 만나서 이런저런 감정을 풀 시점이다. 닛꼬의 명품 가스테라를 한 상자 사들고 도쿄행 기차에 올랐다. 조선통신사가 거쳤던 그 길에 늦가을 낙엽이 하염없이 날리고 있었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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