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정(伴鷗亭)에서 황희를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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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伴鷗亭)에서 황희를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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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3

 

 

반구정(伴鷗亭)에서 황희를 그리워하다

 

 

"파주 교하서쪽 15리, 발아래로 임진강이 흐르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기러기가 손(떼)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20리 이다".

허목(1595-1682. 조선 인조 때 유생으로 양심적 학자의 길을 걷다가 과거응시를 금지당해 중년이 넘어서야 정승 벼슬에 임함)이 반구정을 찾아 남긴 소회다. 그의 말대로 가을 길목에 접어든 강가는 햇살이 엷어지고 머지않아 기러기들이 떼 지어 날아 올 것만 같은 회색 하늘이다. 구월의 오후, 멀리 교하지구 밀집된 아파트촌을 휘돌아 서해로 흘러나가는 물줄기가 붉게 타오르고 있다.

끝없는 철조망 사이로 물살에 쓸려간 모래톱 흔적들이 가지런하다. 강가를 거닐어 보고 싶었으나 마음속에 담아둬야 했다. 분단의 유물을 아직은 넘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명재상 황희(1363-1452)는 기러기를 벗 삼아 구순까지 여생을 보냈다. 관료제가 나라의 근간이었던 우리에게 그는 청백리의 대명사다. 하지만 황희의 입신은 순탄하게 시작되지 않았다.

개성에서 태어난 방촌(尨村 두터운 마을. 황희의 호)은 열세 살 때 아버지(강원도 관찰사)덕에 음보(陰補. 부친이 정승급에 오르면 장남에 한해 9품 벼슬을 내림)에 나섰지만 승진이 어려웠다. 길을 바꿔 학문에 정진한 끝에 26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했다. 기쁨도 잠시 벼슬길 3년만인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

고려충신 73명은 일부종사를 외치며 경기도 개풍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 했다. 조선왕조와 뜻을 함께 하자는 간곡한 설득에 응한 황희를 제외하고 72명이 희생되었다. 화가 난 이성계가 자신을 능멸하는 고려신하들을 모두 태워 죽인 것이다. 피눈물로 세상을 한탄하던 그는 1년 만에 마음을 접고 세자의 스승격인 우정자를 맡았다. 학식과 덕망이 뛰어났던 방촌은 이후 왕조의 부침에 관계없이 승승장구. 42살에 임금의 최측근인 지신사(知申事. 지금의 대통령 대변인)에 오르고 6조 판서를 다 돌았다.


         

            ▲파주 교하 임진강변 반구정에서.


세월이 어수선하더니 천방지축 양녕 대신 충녕(세종)으로 세자가 교체되었다. 왕조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방촌은 궁궐 앞에 거적을 깔고 머리를 풀었다. 장자계승의 전통을 읍소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칼잡이 이방원(태종)에게 대든 격이니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평소 황희를 눈 여겨 보던 태종은 그를 곧 불러들일 요량으로 가까운 교하에 유배시켰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신하들은 더 멀리 유배를 보내 혼을 내야 한다는 상소를 멈추지 않았다. 2차유배지는 전라도 남원.

광통루(후에 광한루로 개명)를 짓고 학문에 소일하던 방촌을 찾아 세종이 몸소 내려와 조정으로 복귀를 종용했다. 이때가 이미 59세.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했으나 넓은 도량으로 인재를 알아본 세종의 성군기질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세종의 간청에 못 이겨 한양으로 돌아온 황희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68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로부터 18년을 재임했다. 조선왕조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화려한 관직을 도맡아 왔지만 황희의 집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가 새는 허름한 우거를 고집했다. 그 형편에도 재물이 생기면 근처 마을사람들에게 모두 나눠 줘버렸다. 보다 못한 세종이 땅 5천 평을 하사하고 제발 재산을 잘 지켜서 노후대책에 힘쓰라고 부탁까지 했다니 그가 왜 청백리의 표상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 조선의 태, 정, 태, 세 까지 7명의 왕을 모신 방촌은 87세에 영의정을 내려놓고 이곳 반구정에 머물렀다. 임진강 두 물줄기가 만나는 교하(交河)의 자연을 노래하며 90에 생을 마쳤다. 세종은 익성(翼成. 큰 학문을 이뤄 날개를 단 선비)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몇 날을 슬퍼했다. 장남 황치신 우의정 등극, 차남 황수신 영의정 등극까지 황희 일가에서는 40여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조선 왕조를 도왔다.

사람들은 21세기에도 황희를 이야기한다. 기품 있고 덕망이 두터워 마음으로 백성을 챙겼던 바른 영의정을 그린다. 훗날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황희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여 재상의 식견과 도량을 모두 갖췄다. 후덕한 자질에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을 다스림에는 검소하고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에 나타내지 않으며 일을 의논 할 때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 큰 줄기)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양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며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청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황제 강희제는"인재를 얻어 흥하지 않은 왕조가 없었고 인재를 잃어 망하지 않은 왕조가 없다"고 했다.  황희는 세종을 조선최고의 성군으로 만들었다. 세종은 황희와 함께 빛나는 역사를 남겼다.  치세의 근본은 시대를 초월한다

몇 번의 지명과 낙마 파동을 겪으며 결국 제 자리 걸음한 우리의 영의정은 이제 그 존재감마저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자기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않는 지금 이 시대, 이 갈등의 질곡에서 소신과 관용의 리더십을 실천하고 간 황희를 그려본다. 반구정을 옆쪽으로 감싼 숲에서는 새소리만 요란하다.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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